수필 나를 겸손하게 만드는 것들
发布时间:21-09-03 08:53  发布人:金昌永    关键词:   

수필

나를 겸손하게 만드는 것들

(할빈)한영남

하늘이 거울처럼 맑고 수정처럼 투명한 가을의 입구에 막 들어서고 있다. 이런 날이면 괜히 기분이 들썩여지며 걷잡지를 못하게 된다.

오전에 잡지사에서 부탁해온 평론글 마무리해서 넘기고 가뜩이나 흥분이 된 상태에서 누군가 위챗으로 좋은 하루 되세요라는 메세지를 보내왔다. 본래 나도 예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했더라면 아무 문제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기어이 내가 시인임을 알리고 싶었던 것이였을가? 전에 써두었던 시 한수를 답변 삼아 보내고 말았다.

울지 마라 눈물은 바다를 더 깊어지게 할 뿐이다

한영남

울지 마라

눈물은

바다를

깊어지게 할 뿐이다

그랬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거기에 대한 반응이 문자로 날아왔다

ㅡ 감성이 많으시네요

그 순간 나는 멍해지고 말았다.

아니, 나를 모르다니? 시인 한영남을 모르고 여지껏 위챗친구로 있었단 말인가?

물론 나는 그 사람이 누군지 모른다. 위챗명으로 친구추가를 해왔고 나는 위챗명이 내 실명임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나한테 친구추가를 해오면 맨 첫마디로 꼭 한마디 하군 했다.

ㅡ 반갑습니다. 한영남입니다.

그러니 나는 나를 위챗친구로 추가를 한 사람들은 당연하게 누구나 내가 한영남이고 내가 시인이고 내가 시인이면서 소설도 쓰고 수필도 쓰고 평론도 쓰는 사람인 줄 알 것이라고 굳게 믿어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감성이 많다니…

이건 꼭 코미디언한테 꽤 재미있게 말씀하시네요 하는 거나 아침식사로 햄버거를 먹는 천만부자한테 돈이 웬만큼 있으시네요 하는 거나 대학생한테 소학교문제도 잘 푸시네요 하는 거나 별 다름이 없는 게 아니겠는가?

순간적으로 드는 내 생각들이 이랬다.

그냥 이모티콘으로 웃음 몇 방울 날리고 말았지만 속이 개운할리가 없었다.

나는 웬간해서는 친구추가를 해오면 실명을 거의 반강제적으로 알아내서 내 위챗에만은 실명으로 표기를 해둔다. 그래서 실명으로 되여 있지 않은 위챗친구는 얼마쯤 지나서 실명을 알아내려고 애쓰다가 상대방이 비밀을 기어이 고수할 의향임을 알아채게 되면 내가 스스로 그런 친구를 잘라버린다. 그건 아무리 사이버공간이라고 해도 례의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어디에 사는 아무개요 하고 인사를 했는데 상대방이 무시를 한다면 일상생활에서는 아무도 그런 오만함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가상세계이고 어쩌고 해도 사람이란 스스로가 지켜야 할 마지노선이라는 게 있는 법이다.

물론 이렇게 말하면 시대에 한참 뒤떨어진 구닥다리 같은 발상이라고 요즘 젊은이들은 웃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건 전적으로 나의 개인 소신이다. 나는 그런 친구들과 위챗친구로 남는 것을 깍듯이 사양하는 편이다.

오늘 이 친구는 바로 내가 얼마 전에 그냥 수락만 해놓고 미처 실명을 확인하지 못한 몇 안되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이였던 것이다.

그리고 점심에 술 한 잔 거치고 쓰러져 한잠 늘어지게 자고나서 오후 네시쯤에 일어났다. 다시 생각해봐도 어이가 없었다. 이것은 내가 아직도 시인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신랄한 풍자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다가 나는 술이 확 깨는 것처럼 갑자기 깨도가 되였다.

그랬다.

시인 한영남 인간 한영남 아들의 아버지 안해의 남편 등등 누군가에게 그렇게 불리우더라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 절대 대부분 사람들에게 있어 나는 그저 그냥 한 인간일 따름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것은 실로 대단히 충격적인 깨달음이였다!

이봐 한영남씨, 자네도 상대방이 누군지 모르지 않는가? 자네도 그 사람이 어디서 무얼 하며 얼마나 훌륭한 인간이고 그 자신의 분야에서 얼마나 멋진 인간인지를 모르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도 그 사람앞에 기어이 시인 한영남을 내세워야 한단 말인가? 시인이 다 뭐길래? 시인이 그리 대단한 존재인가?

혹시 그 사람은 시인 한영남을 모르지만 이 세상을 더없이 성실하게 살아가는 한 인간일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없는 턱을 치켜들고 시인 한영남을 모른다고 해서 오만방자하게 누굴 가르치려 들어?

아아, 이 유치찬란함을 어찌할 것인가.

아아, 이 촌스러움을 과연 어찌할 것인가.

우리는 살면서 누군가로부터 무언가로부터 겸손을 주문받는 경우에 종종 띄우게 된다. 그것이 자의든 타의든간에 상관없이 아무렇게나 불쑥 내밀어져서 우리들의 치켜든 코대를, 턱을 사정없이 후려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다고 해서 그것에 반발을 하거나 불복을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야말로 세상에 얼비쳐진 자신의 실모습임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을의 어느 하루 본의 아니게 나에게 겸손을 가르쳐준 이름 모를 그 사람한테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바로 이런 일들을 겪으면서 우리는 비로소 겸손의 의미를 깨치고 더 나은 인간으로 거듭나는 것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