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평 사람과 사람이 삶에 대한 영혼의 대화를
发布时间:21-06-18 09:15  发布人:金卓    关键词:   

단평

사람과 사람이 삶에 대한 영혼의 대화를

      (연태) 김영수

인문학적 관점에서 복숭아는 수많은 문필가들에게 이상세계에 대한 꿈을 심어 주었다. 복숭아하면 무릉도원이 연상되고 무릉도원은 지금까지 도교적, 유교적 이상형이 되기도 하였다. 그 속에는 공생공존의 가치가 복숭아 꽃처럼 피어난다. 전쟁과 약탈이 없고 오로지 평화가 깃들어 있다. 세종대왕의 아들 안평대군이 꿈에서 아름다운 골짜기와 숲을 지나 보았던 노을빛 고장이 바로 복숭아꽃이 만발한 황홀한 도원이었다고 기록은 전한다.

박만해의 시 <국외인>에서 복숭아가 시사하는 바는 의미가 깊다. 이를테면 오래전부터 복숭아는 나무에 매달려 평화롭게 가을의 황홀경을 즐겼다고 한다. 또 복숭아가 안방과 가택으로 비유되었는데 비유가 낯설면서도 합리적인 것은 우리의 마음 속에 저마다의 무릉 도원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한무제는 ‘복숭아를 무척 좋아하여 뒤뜰에 복숭아나무를 많이 심어 봄이면 아름다운 꽃을 즐기고 여름이면 그 열매를 즐겨 먹었다’고 하였으며 조선시대 한양에서는 ‘의도적으로 복숭아나무를 심었고 복사꽃 아래에서 꽃놀이를 즐겼으며 백성들은 복숭아열매를 배터지도록 먹었다’고 한다.

그런데 복숭아의 이미지가 보여주는 이런 류의 상징성과는 달리, 제목도 ‘국외인’이라고 지어져 있듯이 이 시는 시적화자의 모순과 고뇌에 찬 심적 과정을 표달하고 있다. 긴장감 넘치는 정서 전개 속에서 평온한 삶의 현장 뒤에 숨은 생존을 위한 상잔 혹은 각축장이 묘사되어 있는 듯하다. 표층적 의미에서 필자는 아래와 같이 해석하고 싶다. 먹고 살기 위해서 생명을 가진 자들은 물밑에서 생존 경쟁을 벌인다. 벌레는 나보다 먼저 과일을 탐했고 나는 뒤에 과일을 먹으면서 벌레와 ‘불행과 우연의 만남’을 가졌다. ‘삼켜야 하나 말아야 하나’ 즉 ‘상잔의 계주로 이어갈 것인지’ 라는 내적 갈등을 보여준다. 보잘 것없는 벌레를 한 인간과 대비시킨 것도 흥미롭지만 결국 아주 작은 미세한 영역에서 조차 먹이사슬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 삶의 라이벌 관계를 부각시킨 것은 생존터전이 전례없이 각박해지는 현실생활에 대한 일종의 투영이라고 인식된다. 시에서는 복숭아에 대해 아름다운 시선을 간직한 고인들의 생활적 여유라고는 도무지 찾아볼 수 없다. 이제 표층적 의미를 넘어서 깊게 들여본다면 시에서는 ‘복숭아-가택(안방), 복숭아-오래 전 나무에 매달린 과일’ 이라고 말하다시피 복숭아는 위에서 이미 언급했듯 어쩌면 우리 마음 속에 자리한 이상적인 도원, 그것은 인간들의 마음 속에 깊이 간직한 유구하고 고유한 가치체계나 신념, 신앙 및 풍요로움을 간직한 내적 도원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벌레가 과일의 씨방을 범하면서 생명의 근원을 상징하는 탯줄까지 끊어 놓기도 하고 혹은 인위적으로 누군가 벌레를 과일 속에 추방하기도 한다. 근심거리를 상징하는 기분 좋지 않은 벌레가 들어가 우리의 내적 도원을 파괴했고 그 과일을 먹으면서 삶을 영위하는 우리는 한순간 벌레가 있다는 것에 히스테리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 같다.  ‘새벽을 맞아 느끼는 참지 못할 허기’는 물론 단순한 생리적인 허기일 수도, 정신적인 허기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이 허기를 구실 삼는다는 것은, 무언가 늘 욕구불만 상태 혹은 이름 모를 결핍증에 빠진 인간들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결국 인간이 늘 꿈꾸어 오고, 마음 속에 간직했던 이상적인 공간마저 당위성을 잃어버린 ‘고래고래 울부짖어야 성에 차는’ 내적 딜레마를 시는 의미하려는 것 같다. 결국 삭막한 삶의 현장, 아니 삶의 정신적인 도원마저 벌레먹게 되는 현대인 즉 ‘국외인’의 실존적 상황을 시는 보여주고 있는 듯 하다. 다만 의미를 보여주기 위한 시적 내부의 정서적 긴장관계와 함축성은 좋았지만 아쉬운 점은 상징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이미지의 설정과 전개가 빈약하고 부자연스러운 면이 없지 않다고 본다.  

아래는 작가 류시화가 쓴 「지구별 여행자」- ‘사막 유목민의 지혜’ 에서 외국어를 구사하며 잘난척하는 ‘우리’를 보고 인도사막의 농부가 한 말을 잠깐 인용하기로 한다. ““난 내 고장어인 마르와리어와 내가 기르는 낙타들의 언어, 그리고 신과 대화를 나는 영혼의 언어를 이해할 줄 안다오. 뒤의 두 가지는 아마도 당신들에게 이해할 수 없는 외국어일 것이요. 당신들이 아무리 외국어 실력이 유창하다 해도, 신과 대화를 나눌 줄 모른다면 그 모든 것은 쓸모없는 일일 것이오.”  

이 한단락 글을 보면서 느낀 것은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들의 창백성이다. 이를테면 빗소리를, 눈내리는 소리를 어떻게 정확히 표달하고 번역한단 말인가? 시 <번역할 수 없는 슬픔> 에서도 이런 언어적 창백성으로부터 오는 사물과 어머니와 누이에 대해 표현할 길 없는 내적 정감과 감수들이 사무친다. 언어의 한계성은 대신 인간에게 직감을 선사하고 영혼의 대화를 가지도록 한다. 시적화자 역시 ‘텅빈 가을하늘’ 과 ‘산속의 깊은 정적’ 을, 어머니와 누이와 연관된 모든 기억의 장면들에서 느끼는 목메임을 번역할 길이 없다고 한다. 특히 첫 련과 두번 째 련에서 ‘낙엽을 방목하면서 바라보는 가을하늘이 번역할 수 없다’고 하는 부분과 ‘구름밤을 스쳐지나는 철새와 밤의 정적과 별들’이 생동한 의인화와 뚜렷한 시각화 전개로 되어 있어서 신선감을 주고 자연과의 영혼적 교감 조성이라는 점에서 직감을 자극하고 있다. 나아가 과거를 회상하고 시를 상념하면서 어머니와 누이를 그리워하는 뒷부분의 련들은 우리의 보편적 어머니상을, 우리 민족의 상징적 어머니와 누이들에 대한 공동의 정감을 갖도록 한다. 이런 공감대를 매개로 우리는 서로가 번역할 수 없는 감정으로 이향민의 가슴 한 곳에서 사무치는 그리움을 조금이나마 무마할 수 있지 않을까 본다. 차라리 그리움을 영원히 해독하지 않고 저 노을 속에 감추어둠으로써 해가 어스름히 질 때면 인간과 자연이, 사람과 사람이 삶에 대한 영혼의 대화를 하면서 한 철을 보내는 것도 아름다운 풍경일 것이다.

그러나 웬지 이 시에 대해서 탐탁치 않은 면이 있다. 윤동주시인의 시 ‘별헤는 밤’을 보는 듯 하였다. 종결어미의 사용도 그렇고 정서표달 방식과 산문적인 시적구조, 이름을 불러보는 행위 및 ‘가을밤’, ‘별’, ‘어머니’, ‘소녀-누이’, ‘고향’ 등 이미지의 사용은 ‘별헤는 밤’을 따르고 있다. 또한 필자가 볼 때는 언어적 절제와 감정이 여과 없이 표현된 것도 이 시가 앞으로 많은 주의와 개선이 필요한 부분이다.

이제 위의 두 시를 마무리하면서 필자는 박만해 시인의 시적감수성, 시어가 지향한 상징성과 주제의식에 대한 탐구는 높이 사 줄만 하지만 보다 다양한 이미지의 설정과 유기적인 구성, 전개 및 자신만의 독특한 화법과 개성적인 시적 면모로의 바람직한 변화는 앞으로 꼭 갖추어야 할 희망사항이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