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광인 련재작ㅣ중국혁명 속 우리 겨레 혁명가들(관내편) - 129
发布时间:20-11-17 06:04  发布人:金卓    关键词:   

진갱이 떠난 지 얼마 안되여 간부퇀 선두부대가 적들과 맞붙어 싸우게 되자 금사강 쪽 류백승은 조성된 군사정세의 엄중함을 짐작하고 간부퇀 정위 송임궁에게 간부퇀 나머지 부대를 이끌고 지체없이 통안주로 달려가 간부퇀 주력부대와 힘을 합치라고 명령하였다.


"이는 한차례 관계가 중대한 전투입니다. 반드시 모든 희생을 아끼지 말고 견결히 적들을 소멸하고 통안주를 점령하여 전군의 순조로운 도강을 담보하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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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령을 받은 송임궁은 신속한 행동을 취하였다. 어스름이 깃들 때 소속부대를 이끌고 통안주에 도착하니 진갱과 양림은 부대를 지휘하여 적들과 한창 싸우고 있었다. 싸움터에서 정위를 만난 양림은 무척 기뻐하면서 전투의 긴장함을 터놓았다.


"“전투규모가 커지고 있습니다. 얼마 전 거리로 짓쳐 들어가 적의 박격포를 로획하였습니다. 적아병력이 현저하여 우리가 금방 물러나왔고 적들도 아직 소멸되지 않았습니다."(144, 《송임궁회고록》, 해방군출판사, 2007년 8월 제2차 인쇄, 제64페이지).


송임궁 정위가 이끄는 제3영의 나머지 부대가 제때에 나타난 데서 간부퇀 장병들의 사기가 백배 부풀어올랐다. 그들은 힘을 합쳐 그밤으로 끝내 적 100여명을 소멸하고 600여명을 포로하는 대승을 거두었다(145, 소지붕, 《홍군장정 회리를 지나다》, 2007년 1월 출판, 제50페이지).


살아남은 적 잔여부대는 밤도와 회리현성을 바라고 달아나버렸다. 간부퇀은 10여리나 적들을 추격하면서 쫓아버려 홍군주력부대의 금사강도하에 절대적인 안전을 담보했다.


이것이 통안주전투 모습이라면 간부퇀은 통안주전투를 결속지은 후 통안의 사방가(四方街)에서 군중대회를 열고 홍군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싸우는 자기대오라고 선전하면서 빈농단(贫农团)을 조직하는 모습도 보여준다. 양림도 이 모습의 주요 지도일군중 한사람이다. 그들은 빈농단을 도와 지방토호들을 까부시며 승리의 과실을 군중들에게 나누어주었다(146, 《홍군장정 회리를 지나다》, 2007년 1월 출판, 제86페이지).

 

 
홍군은 통안에 머무르는 사이 장관(彰冠), 남각(南阁), 동패(东坝), 적수(积水), 회리북관(会理北关), 사종촌(四宗村) 등지에도 당지 군중들을 도와 빈농단을 조직하였다.


통안주진공전은 교평도습격전의 계속이였다. 서로 이어지는 이 전투들에서 양림은 간부퇀 장병들과 더불어 정말 통쾌히 잘 싸웠다. 통안주진공전을 망라하여 련속되는 몇차례의 전투를 거치면서 간부퇀은 명성을 떨치여 국민당 사천군(川军)은 홍군간부퇀이란 말만 들어도 벌벌 떨며 달아났다. 중앙군위에서는 간부퇀에 표창령을 내렸고 통안주를 지켜선 간부퇀은 이튿날 승전의 기분 속에서 표창대회(庆功大会)를 가지였다.

 


간부퇀의 통안주 점령은 전군 금사강돌파를 유력하게 담보하였다. 바깥 적 저격중에 있는 홍9군단이 다른 나루터로 도하한 외 모택동이 이끄는 중앙홍군은 5월 3일부터 9일까지 옹근 7주야의 강행도하 끝에 수만에 달하는 홍군대오 전부가 강을 건넜다. 모택동, 주은래, 주덕 등 동지들도 양림 등 간부퇀의 용사들이 열어놓은 진군로를 따라 나루배에 앉아 금사강을 건넜다.


적들은 홍군대오가 전부 금사강을 건넌 후에야 금사강 남안에 이르렀으니 홍군이 나루배를 몽땅 태워버린 데서 탄식만 할 뿐이였다. 모택동은 대단히 기뻐하면서 "금사강을 넘으면서 우리는 장정이래 줄곧 우리를 쫓고 있던 장개석군대를 떨구어놓았습니다. 이는 장정의 거대한 승리입니다"라고 말하였다(《공화국장군 진갱》, 제61페이지).

장강의 원류


금사강─홍군의 장정력사, 간부퇀의 력사에 길이 남을 금사강은 어떤 강이며 금사강 도하와 통안주 현지는 어떠할가? 먼저 금사강의 관련자료와 청해, 사천 등 지도를 펼치면 금사강은 중국 장강의 상류로서 청해 경내 탕구라(唐古拉)산맥의 거라단둥설산(格拉丹冬雪山, 해발 6,621미터) 북쪽에서 발원한다. 장강의 원류에서 최초 원류를 이루는 이 강은 93양로반(道班) 구간에서 109국도, 즉 북경에서 녕하 은천, 감숙 란주, 청해 서녕을 경유하여 서장 라싸로 이어지는 국도를 넘어 여러 갈래의 강들과 합류하여 통천하를 이룬다. 통천하가 동으로 흐르다가 동남으로 꺾어지며 청해 옥수현 구간에서 횡단산구(横断山区)에 들어서면서 금사강으로 불리운다.

 

금사강은 청해 옥수를 지나 서장과 사천 변계를 따라 곧추 남으로 흘러내린다. 그러다가 운남의 덕흠 구간에서 운남 경내에 흘러 들고 운남의 덕흠, 샹그리라, 려강 구간을 지나고 사천의 판즈화 구간을 지나면 운남과 사천의 변계를 따라 북으로 길게 흐르다가 사천분지 서남부 의빈에서 사천 경내로 쏟아지는 민강을 받아들이며 장강으로 불리운다. 그만치 금사강은 전체 길이 2,316킬로미터를 기록하면서 그 락차가 3,300미터의 거대 차이를 이룬다. 운남의 호도협(虎跳峡)을 으뜸으로 하는 대협곡과 험요한 구간이 얼마인지 모른다.

금사강은 일찍 2,000여년 전 전국시대의 《우공(禹贡)》이라는 력사문헌에서 흑수(黑水)로 기록되고 그후의 《산해경》에서는 승수(绳水)로, 삼국시대에는 로수(泸水)로 기록된 력사를 보인다. 북위 력도원의 《수경주》에는 금사강의 수계가 상세히 기록되여있지만 금사강과 장강의 관계에 대해서는 말하지 못하고 있다. 금사강은 이 밖에 려수, 마호강, 신천 등 이름을 가지고 있으며 송나라 때에 이르러 강에 금을 캐는 사람들이 많이 나타나 금사강으로 불리웠다고 한다. 그후 명나라 지리학가 서하객은 현지답사를 거치여 "장강의 원류는 금사강"이라고 지적하여 력사문헌 《우공》이래 2,000여년의 오류를 바로잡아놓았다. 흥미로운 것은 교평도 북안 회리현 통안진을 망라하여 금사강은 사천 경내에서 전체 량산쫭족자치주의 회리, 회동, 녕남, 포시, 금양과 뢰파 등 6개 현을 거치면서 598.7킬로미터의 길이를 형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필자가 금사강이라고 처음 대한 것은 2010년 여름방학, 처음으로 운남─사천─귀주 홍군장정길 답사에 나섰던 운남땅에서였다. 이 해 8월 4일 밤, 필자와 일가족 다섯은 강남땅 절강 소흥을 떠나 2,400여킬로미터를 달려 8월 6일 아침에 운남땅 곤명에 도착하였다. 처음은 일가족의 단란한 운남려행, 곤명의 석림과 운남강무당을 유람답사하고 운남의 대리와 려강을 거쳐 샹그리라 쪽으로 움직이는데 려강을 떠나 얼마안되여 려강과 샹그리라의 변계지대 산기슭에 이르니 산 아래 쪽에 금사강이 보인다. 달리는 뻐스에서 사진을 찍으며 필자는 심히 흥분되였다. 처음 보는 금사강이란 존재가 그리도 마음을 뒤흔들어놓으리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다.


산을 내리니 샹그리라행 뻐스는 일정한 구간을 내내 금사강을 따라 달린다. 기분이 그리도 좋을 수가 없다. 이 구간에서 뻐스 오른쪽으로 아아한 재빛산이 보이여 길손들에게 물으니 이름난 옥룡설산(해발 5,596미터)이라고 한다. 옥룡설산에 이어 눈에 뜨이는 것은 금사강의 최대협곡을 이루는 호도협의 처음 구간 금사강이다.


호도협의 처음 구간에서 뻐스는 길을 달리하며 금사강을 떠나 골안길로 샹그리라를 바라고 달림이 유감이라지만 바로 코앞에 두고 볼 수 없고 갈 수 없는 호도협이 그리도 유혹적이다. 호도협이 어찌도 아래로 꼰지는 급류인지 최대 류속이 초당 10미터라고 하니 상상해 보시라. 대협곡의 우안은 해발 5,596미터의 옥룡설산, 좌안은 해발 5,396미터의 하바설산이란다. 일년내내 눈이 녹지 않는다지만 그것은 선전일 뿐 필자가 평지에서 본 려강과 샹그리라의 여러 설산들 주봉에서 눈을 보지 못하였다.

 

오늘의 통안진


운남의 곤명과 대리, 려강, 샹그리라 등지 가족유람을 마치고 필자는 샹그리라에서 가족과 헤여져 홀몸으로 운남과 사천, 귀주 홍군장정 답사길에 올랐다. 서장 라싸의 부다라궁을 방불케 하는 샹그리라의 송찬림사(松赞林寺)에서 장정길 하룡과 그의 홍군부대가 거치여간 석가모니전 등을 답사하고 필자는 샹그리라를 떠나 481킬로미터 사천 판스화시 답사길에 나섰다.


오후 5시 샹그리라를 떠나 뻐스는 이튿날 8월 14일 이른 새벽 5시에 판즈화시 도착이다. 두번째로 대하는 금사강을 보다 알고파 낮내내 판즈화시를 흐르는 10 여리 구간 금사강을 오르내리다가 오후 4시에 사천 회리행 뻐스에 오르니 판즈화시와 회리현성 사이는 110킬로미터, 장정길 중앙홍군이 경유한 회리현성에서 하루밤 쉬고 이튿날 오전 회리 통안진행 뻐스를 잡아탔다. 회리현성과 통안진 사이는 멀지 않은 54킬로미터다. 쉽게만 본 54킬로미터를 뻐스는 3시간 나마 달린다. 문제는 그다음부터이다.

 


샹그리라를 떠나 길에서 1,000여리 길 뻐스에 시달리며 통안진에 이르니 통안진에서 27킬로미터 밖 금사강교평도를 달리는 뻐스가 없다. 향진길이 그러하리라 각오한 바여서 대수롭지는 않았다. 대기중인 여러 오토바이들이 너도나도 나서지만 구릉길, 산간길을 념려해 오토바이들을 사절했다. 한 오토바이수가 한 구간을 달리며 필자를 어느 소형뻐스까지 안내한 데서 쉽게 소형뻐스를 리용할 수 있었다. 달리는 뻐스는 구간구간 볼 곳이 있어도 지나쳐야 하지만 택시류는 도중에 임의대로 세울 수 있어 리상적이다.


소형뻐스 운전기사는 맘씨 좋은 40대였다. 필자가 통안진은 당년 장정길 홍군이 싸운 전적지여서 잘 보아야겠다고 하니 그는 진내에서는 전체 모습을 잘 볼 수 없다면서 저 앞 둔덕길에 가면 잘 보인다고 한다. 운전기사는 한참을 달리다가 소형뻐스를 세워주었다. 통안진 전체가 환히 보이는 언덕길이다. 필자는 디지털카메라로 사진을 몇장 남기며 한참이나 통안진과 그 주변 일대를 눈에 익히였다. 장정길 양림이 직접 지휘한 통안진공격전이 아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