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광인 련재작ㅣ중국혁명 속 우리 겨레 혁명가들(관내편) - 128
发布时间:20-11-17 06:03  发布人:金卓    关键词:   

사자산 전투

금사강 북안에서 통안으로 가자면 직선거리가 10리 쯤은 잘 되여보이는 깊은 골안구간을 지나야 한다. 금사강을 떠나서 한참 북으로 가면 ‘관문’을 이룬 바위절벽 구간을 지나 오른쪽으로 굽어들다가 다시 왼쪽으로 탈며 나아가야 하는데 골안 량쪽은 경사도가 급한 산비탈로 되여있다. 오른쪽은 가끔 현애절벽을 이루며 산천경개가 수려하다. 이렇게 골안 따라 몇리 올라가면 골안은 높은 산언덕에 막히면서 골안이 좁은 골안으로 변하고 좌우로 길게 뻗어간다.

당년 금사강반을 떠난 간부퇀 제3영 2개 련은 양림의 인솔하에서 이곳 골안 따라 들어가다가 ‘관문’구간을 지나 오른쪽 사자산쪽으로 톺아오르기 시작하였다. 《공화국장군 진갱》에서는 이곳을 말하면서 한쪽은 깊이가 보이지 않는 심연이고 다른 한쪽은 절벽이며 산에 오르기가 사타리를 타는 것과 같다, 진갱은 부대를 령솔하여 약 10리 길을 톺다가 산정에 올랐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진갱은 곧 벌어질 사자산전투에 참가하지 않았다.

 

홍군장정의 발자취를 돌이켜 보면 금사강천험을 돌파한 홍군대오는 사천 대량산 지구를 지나면서 모두 세차례의 전투를 겪게 된다. 사자산전투, 일파산량자전투(一把伞梁子战斗), 회리현성진공전투가 그러한데 이 세차례 전투는 모두 회리현 경내에서 벌어졌다. 그중 사자산전투와 일파산량자전투는 통안구간에서 벌어진 전투들이기에 통칭하여 통안주전투, 또는 통안주격전으로 부른다. 양림은 이 세차례 전투에 모두 참가하였고, 명령에 의해 첫 전투인 사자산전투를 직접 지휘하여 나섰다.

금사강북안에서 통안쪽으로 뻗은 골안에 들어서노라면 오른쪽 산비탈에 하늘높이 솟아오른 몇개의 바위군체를 보게 되는데 이 바위군체를 사자산이라고 부른다. 이 사자산 산허리의 고지에 적군 류북해 영(刘北海营)이 지키여 적아쌍방의 격전은 불가피하였다. 홍군을 발견한 적들은 맹사격을 퍼부으며 돌들을 마구 굴리는 바람에 돌파하기가 자못 어려웠다. 양림은 소경광과 함께 반격을 조직하며 박격포와 중기관총으로 적의 화력을 제압하도록 지휘하였다. 간부퇀 장병들은 커다란 바위와 구간구간 틈서리를 은페물로 삼으며 한걸음 한걸음 적진으로 다가갔다.

어느덧 결사전은 한시간 푼히 지속되자 적 진지 아래측에 한개 패의 아군병력이 집결되였다. 양림의 명령에 좇아 돌격 나팔소리가 산곡간을 울리자 간부퇀 장병들은 적진으로 짓쳐나갔다. 놀란 적들은 진지를 버리고 죽을 둥 살 둥 통안 쪽으로 줄행랑을 놓았다. 양림을 선두로 한 간부퇀의 용사들은 멸적의 기세로 적들을 줄곧 통안주까지 추격하여갔다. 통안거리를 기습하면서 적들의 일부 무기와 두 문의 박격포를 로획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적정을 잘 모르면서 홀로 적진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은 일이 아니였다. 양림은 소경광과 더불어 철거명령을 내리였다. 이를 전후하여 사자산의 적장 류북해는 패주하면서 회리현성을 지켜선 금방 천강변방군(川康边防军) 부사령 겸 제1려 려장으로 오른 류문휘(刘文辉)의 제24군 제1려 려장 류원당(刘元塘)한테 사자산을 빼앗겼다고 보고를 올리는 한편 100여명의 패잔병을 이끌고 회리를 바라고 달아났다.

류원당은 깜짝 놀랐다. 회리를 지켜선 이 국민당 려장은 회리와 통안 구간은 운남으로 통하는 큰길이기에 홍군이 회리쪽 금사강으로 도강하기가 어렵다고 보았다. 이런 판단하에 소속 29퇀과 30퇀을 각기 교가와 강역에 파견하고 회리현성에 29퇀을 남기였다. 또, 29퇀에서 류북해의 영을 뽑아 통안쪽과 통안쪽으로 가자면 꼭 지나야 할 높고 험요한 사자산 구간을 지켜서게 하였다. 교평도 금사강가는 당지인들인 왕보경(王保卿) 형제의 강방대대(江防大队)에 맡기였다. 교평도나루터에 이른 간부퇀 전위련인 5련이 나루배 2척으로 선참 금사강을 건너 북안 리금국 보안대 30여명을 생포한 보안대가 바로 왕보경의 수하들이였다.

 

류북해의 패주 소식에 격노한 류원당은 자기가 직접 산하 29퇀 1영과 3영, 공병영, 려부 권총련, 박격포련 등 근 2개퇀의 병력을 이끌고 통안으로 내달았다. 류원당은 통안의 뢰타수량자(雷打树梁子)에 이르러 류북해를 만났고 된욕을 퍼부었다. 도리대로라면 금사강 교평도나루터 쪽을 경시한 자기가 주요책임을 져야 하련만 그렇지 못한 모양이다. 

통안주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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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때 진갱 퇀장이 간부퇀 주력부대를 이끌고 사자산에 나타났다. 《홍군장정 회리를 지나다》의 서술이다. 어인 영문인지 진갱은 그날 금사강을 건넜고 금사강북안 바위동굴에서 모택동, 주은래, 주덕, 류백승 등 지도자를 찾았다고 한다. 또, 양림을 선두로 한 제3영부대가 멀지 않은 사자산에서 어려운 전투를 치르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중앙군위와 류백승의 명령으로 담가에 앉아 사자산으로 급파되였다고 알려진다. 이는 《홍군장정 회리를 지나다》의 글에 그대로 서술되여 있다.

금사강 강행도하에서 간부퇀 전위련이 금사강천험을 처음 돌파하는 모습을 제외하고는 필자는 간부퇀이나 진갱 등에 대해서 자상히 알려지는 자료를 보지 못하였다. 모택동 등이 5월 5일 금사강을 건너 바위동굴에 자리를 잡았고 관련회의를 끝낼 때 진갱이 금사강을 건너 담가로 다달았다는 데 대해서도 잘 모르고 있다. 《공화국장군 진갱》전기에 따르면 황포군관학교 제1기생이고 남창봉기 참가자인 진갱은 다리 등에 여러차례 부상을 입은 것으로 나타난다. 

1903년 호남 상향현(湘乡县) 출신인 진갱은 1923년 6월 1일, 장사의 량호부두에서 가진, 일본에 대해 경제절교 실행을 요구하는 한차례 투쟁에서 경상을 입었다지만 1925년 10월 황포군관학교 동정군이 군벌 진형명을 토벌하는 제2차 동정에서 다리에 부상을 입은 것으로 보인다. 남창봉기시기인 1927년 8월 30일 무창성진공전투에서는 왼쪽 다리 두곳에 중상을 입는다. 1932년 9월, 홍4방면군이 국민당의 제4차’포위토벌’을 분쇄하는 한차례 전투에서 진갱은 또 오른쪽 종아리뼈가 적탄에 관통되는 부상을 입었다.

진갱은 이런 부상과정을 거친데서 금사강으로 진군하는 280리 강행군과 금사강도강을 조직 지도하는 과정에서 과로로 인해 담가 신세를 지지 않았나 생각된다. 진갱이 간부퇀 주력부대보다 늦게 금사강을 넘어 군위총부를 찾은 것은 금사강 남안 도강지휘와 관계된다고 보아진다. 이런 과정 속에서 진갱은 통안주전투의 첫 전투인 사자산전투에 직접 참가하지 못하고 참모장 양림이 총지휘로 나서게 된다.

여기까지는 진갱의 일이고 관련자료 검토에 의하면 간부퇀과 중앙기관 등이 금사강을 넘은 시간 개념도 뚜렷하지 못함을 보이고 있다. 소지붕은 《홍군장정 회리를 지나다》에서 모택동이 금사강을 건넌 날자를 5월 5일로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주요지도자들이 바위동굴에서 관련회의를 가지였고 회의가 끝나자 금사강을 금방 도강한 진갱이 명령을 받고 간부퇀 주력부대를 이끌고 사자산에 나타났다고 적고 있다. 역시 5월 5일의 일이다.

2

모순점은 여기에 있다. 소지붕은 책에서 간부퇀 정치부주임 막문화의 회고에 따르면서 양림 등이 류백승으로부터 통안주 출격과업을 맡은 시간을 5월 4일 아침해가 떠오르던 시간으로 보고 있다. 그러다가 진갱의 등장에 이르러서는 5월 5일의 일로 적고 있으니 필자는 모순이라고 말한다.

 

모순점 하나가 또 있다. 소지붕이 본 간부퇀 정치부주임 막문화의 회고에는 통앙주 출격과업을 맡은 시간이 5월 4일 아침해가 동산에 떠오르던 시간대이고 양림을 망라한 간부퇀의 장병들이 약속이라도 한듯 금사강가에 모여 노래도 부르고 세수도 하던 때 긴급나팔소리가 들려왔었다지만 필자가 본 막문화의 회고록은 이와 다르다. 앞에서 이미 이 부분을 언급하였기에 스쳐 지나지만 《중국로농홍군 장정 경력기》에 실린 <5.1의 전후>에서 막문화는 금사강 북안 점령을 5월 1일 밤으로 적고 있다. 이에 따르면 통안주 출격과업을 맡은 시간도 5월 2일이 아니면 5월 3일로 된다고 보아진다. 배를 얻는 시간에, 몇척 안되는 배로 거듭거듭 건너야 하는 간부퇀의 시간대까지 감안하면 교평도에 이르자 곧 도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는 오늘에 와서 확실히 아리숭함도 보이지만 진갱 퇀장이 거느린 간부퇀 주력부대는 험요한 사자산에서 양림, 소경광이 이끄는 제3영 2개 련과 상봉한 것은 사실이다. 그들이 힘을 합쳐 통안주로 내달으니 적 류원당이 이끄는 부대도 금방 통안진에 이른 상태다. 적들은 통안주 파심촌(坝心村)을 지나 일파산량자 감제고지(制高点)를 차지하고 있었다(143, 소지붕, 《홍군장정 회리를 지나다》, 2007년 1월 출판, 제49페이지).

 

양림을 알리는 장정관련 여러 자료들에서는 금사강에서 통안주까지 보통 40리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당년 홍군이 다녀간 직선거리를 두고 하는 말인가 보다. 필자의 현지답사에 의하면 도로표시계가 27킬로미터로 나타난다. 길은 구릉지대를 따라 돌고 도니 그런 것 같다.

오늘의 통안주는 이제 뒤 답사글에서 자세히 보도록 하겠지만 옛날의 통안주가 아닌 통안진으로 통한다. 통안진은 하나의 자그마한 평원지대를 이룬 구릉언덕 아래 좁고 길게 자리하고 있는데 사위는 산을 방불케 하는 구릉지대로 되여있다. 진갱, 양림이 이끄는 간부퇀의 주력부대는 통안주에 다달아 사천의 회리 쪽에서 금방 몰려온 류원당의 근 2개 퇀 병력과 조우하게 되였다. 병력으로 보아 적아쌍방은 현저한 대비를 이루는데 쌍방은 서로 일파산량자 고지를 차지하려고 치렬한 조우전을 벌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