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광인 련재작ㅣ중국혁명 속 우리 겨레 혁명가들(관내편) - 126
发布时间:20-11-13 10:08  发布人:金卓    关键词:   

두 책에 실린 막문화의 회고문을 대조하여보니 삭제하고 임의로 뜯어고친 흔적을 가끔 찾아볼 수 있었다. 필자가 그토록 찾고저 하던 양림의 행적이 《홍군장정기》의 제228페이지 막문화의 회고문에 똑똑히 밝혀져 있었다. 회고문에서 막문화는 금사강진군 전위영은 퇀정위 송임궁이 이끌고, 간부퇀의 주력부대(2개 보병영과 특과영, 상간대)는 퇀장 진갱과 참모장 필사제, 정치부주임인 자기가 이끌었다고 찍어 말하였다.

 

   

간부퇀의 행적

1

지금까지 양림평전을 집필하면서, 더구나 4월 29일 금사강을 강행도하기로 한 중앙군위의 결정이 시달되여서부터 금사강을 도강하기까지 며칠간의 행적을 두고 중앙군위 간부퇀과 양림 관련 많고 많은 회고정리자료들과 참고서들을 찾아 보았다. 그중에서도 중심을 이루는 참고서와 자료들은 간부퇀 정위인 송임궁의 회고록과 《공화국장군 진갱》전기, 《공화국장군 소경광》전기, 간부퇀 주요간부들인 막문화의 회고, 간부퇀 전위련 련장 소응당의 회고,중공회리현위당사공위판공실의 1984년 12월 19일 고증 등이다.

먼저, 간부퇀 정치부주임 막문화의 회고문에서 간부퇀의 행적을 찾아보기로 하자.

막문화의 회고문—<51의 전후>(137, 《중국로농홍군 장정 경력기》, 사천인민출판사, 2007년 6월 5차 인쇄, 제151-154페이지)를 보면 1935년 4월 29일 간부퇀은 5월 1일에 금사강 교평나루터를 탈취하라는 중앙군위의 지시를 받고 그날로 운남의 주숙지를 떠나 280리 밖 금사강으로 움직인다. 막문화는 간부퇀 전위련인 5련을 정치영 8련으로 생각하는 것 같고 어느 시각에 행동을 개시했는가는 언급하지 않았다.

다음날이 아직 밝지 않은 4월 30일로 나오고 하루간에 100리 길을 걸었다고 한다. 나머지 180리 길을 행군해야 하는 래일이 5월 1일인것 같다. 이날 어스름이 깃들 때까지 간부퇀은 130리를 강행군하였다. 50리가 남았다. 또 5시간을 강행군하니 시간은 2경(二更时分)을 가리킨다. 2경이면 22시, 즉 밤 10시를 가리킨다. 금사강 남안의 수색을 거쳐 나루배 2척이 발견된다.

나루배 2척은 사람 30명을 태울 수 있다. 그래서 전위련 1패가 먼저 도강하고 륙속 도강을 조직한다. 북안에 다달은 1패는 신속히 북안의 리금국을 지혜롭게 탈취, 30여명 무장대를 망라한 60여명을 생포하고 이자들이 마구 거두어들인 세금 5000원을 로획한다. 간부퇀 전위련은 총 한방, 사람 하나 손실없이 금사강 북안을 점령하고 5월 1일에 금사강을 탈취하라는 과업을 완수한다.

다음, 간부퇀 전위련 련장 소응당의 회고문(138, 《금사강의 기억》, 운남인민출판사, 2006년 9월 출판, 제78-84페이지)이다. 이 회고문을 보면 4월 하순 간부퇀 소속부대가 머무른 곳은 200ㅡ300세대를 이루는 운남의 한 마을. 이 때가 4월 27일 경인데 사흩날인 4월 29일 오전까지도 출발령이 없다가 점심 퇀부전령병의 부름을 받고 회의장소인 퇀부로 갔고, 중앙에서는 간부퇀에 금사강 교평도나루터 탈취과업을 맡기고 간부퇀 제2영(실제는 제3영임) 5련이 전위련으로 되였다고 한다. 전위련 련장이 소응당이다.

 

2

간부퇀은 인차 간편한 차림을 하고 식사를 한 다음 곧 출발한다. 동행한 지도일군들은 부영장 곽해원(霍海元)과 지도원, 공작조의 리동지 등등. 이들은 오후 낮과 밤사이 내처 강행군한다. 이튿날 날이 밝자 10분을 휴식하고는 또 70-80리를 행군. 하나의 큰 산을 넘으니 금사강과의 거리는 불과 60여리. 금사강변에 곧 이를 때는 이미 해가 서산으로 떨어진 뒤였다.

송임궁의 회고록을 보면 금사강으로 출발할 때 간부퇀 선견영과 주력부대는 같이 출발하였지만 도중에서 달라진다. 마지막 하루 160리를 앞두고 류백승은 이 하루에 어떻게라도 160리를 강행군하여 금사강 교평도나루터에 도착하여야 한다고 명령한다. 류백승과 송임궁이 동행하였다. 그들의 과업은 교평도나루터를 신속히 점령하고 부교를 놓아 후속부대의 도강을 보증하는 것이였다. 그러나 간부퇀 주력부대는 마지막 하루 100리 쯤만 행군하고 도중에 숙영하면서 휴식을 취하였다. 왜냐하면 양림소속 이 부대는 선참 금사강을 도강한후 통안주로 진격하여 사천의 서창, 회리 쪽에서 달려들 수 있는 적들을 소멸하며 중앙홍군의 도강을 엄호하여야 했다.

금사강진군 마지막 날 160리를 앞둔 지점, 간부퇀은 전체 장병들이 참가한 가운데 한차례 정치동원회의를 하였다. 시간을 쟁취하기 위하여 선견영은 홍군모자의 모표를 뜯어내고 국민당군으로 위장하여 강행군에 나섰다. 도중에 흩어져 있는 적들을 만나도 알은 체 하지 않고 후속부대가 소멸하도록 하였다. 결과 송임궁은 류백승과 자기는 이른아침에 금사강반에 도착하고 진갱 등 주력부대는 숙영지를 떠나 금사강변에 이르니 이미 정오였다고 회고하였다.

간부퇀 선견영의 전위련이 금사강 남안 교평도에 이르고, 뒤미처 전위패 1패장이 뛰여와 보고한 데 의하면 적들은 련며칠 금사강 대안의 수백리의 방선을 통제하고 크고작은 배 전부를 북안에 가져가면서 수상교통을 단절해 버렸다. 교평도 대안의 적들은 매일 정탐을 강 남안에 보내 홍군의 동향을 탐지하는데 오늘 건너온 놈들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고 그자들이 타고온 배가 떠나지 않고 있었다. 강가로 가서 벌벌 떠는 사공을 진정시키며 형편을 알아보니 강 대안에는 원래 세금을 관리하는 리금국과 30-40명 보안대가 있을 뿐인데 오늘 아침 정규균 1개 련이 증가된 상태. 적들이 교평도나루터는 주요한 나루터가 아니라고 여긴 데서 방비가 그리 심하지 않았다.

전위련 련장 소응당은 부영장과 토의하고 사공을 설복한 뒤 자기가 전위련 1패와 2패를 지휘하여 선참 도강하여 대안을 점령했다고 한다. 부영장과 지도원, 공작조는 모두 강 이쪽에 남았고, 3패가 남아 경계를 담당하며 화력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3

여기까지 보면 간부퇀은 4월 29일 오후 운남의 주숙지를 출발하였고 그 선견대가 5월 1일 저녁에 금사강 교평도나루터에 도착한 것으로 나타난다. 막문화와 소응당의 주요한 차이점은 2척의 배로 금사강을 선참 도강할 때 1패가 나섰다, 1패와 2패가 같이 나섰다 이다. 여기에서 주의할 점은 송임궁의 회고록이다. 송임궁은 자기의 회고록에서 금사강 남안에서 찾아낸 것은 두척의 나루배이고 이 두척의 배에 전위련의 1개 패가 앉아 금사강 북안으로 강행도하하였다고 쓰고 있다.

송임궁의 회고는 간부퇀 정치부주임 막문화의 회고—배 두척에 30명만 오를 수 있기에 제1패가 선참 도강했다는 설과 어울린다. 필자는 누구의 설이 옳다고 따지고 싶지 않다. 이런 두가지 설이 있음을 지적하여 보는 이들의 리해에 맡기는 것이 적합한 것 같다. 홍군의 금사강 강행도하에 배사공으로 나선 장조만(张朝满)이 배 6척을 회고할 때 큰배 2척에는 각기 60명이 탈수 있고, 작은배 4척에는 각기 40명이 탈 수 있었다면서 홍군은 규률이 엄하여 한사람이라도 더 타면 안되고 한사람이라도 적게 타도 안되였다고 말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작은배 한척에 무조건 40명씩 오를 수 있었을가? 현지 사정은 꼭 그렇지만은 않은것 같다. 간부퇀의 전위련이 금사강 남안에서 처음 찾아낸 2척의 배는 강 북안의 몇몇 정탐 나부랭이들이 남안을 살피느라고 건너온 작은배로서 한배에 능히 40명이 오른다고 찍어 말하기가 어렵다. 15명이 타는 작은배일 수도 있는 상황이다.

간부퇀의 금사강 도강 주요의거 도서는 송임궁의 회고록으로 보았다. 두척의 배 관련 상황은 이러하지만 송임궁의 회고록은 4월 29일부터 5월 1일까지, 그후 며칠간에 대하여 시간교대에 그닥 주의를 돌리지 않았다. 진갱전기도 이 부분 시간들을 거의 밝히지 않는다. 간부퇀 상간대 대장인 소경광의 전기는 금사강 강행도하에 대하여 거의 언급이 없다. 전위련을 제외한 간부퇀의 행동에 대해서도 자상히 밝혀지지 않았는데 리해가 간다. 한사람의 회고문에서 지난 력사를 시간에 이르기까지 제대로 자상히 밝힌다는 것은 무리이기 때문이다. 

4

중공회리현위당사공위판공실의 고증에는 시비가 있다. 고증 전칭은 "중앙홍군장정중 금사강도강일기에 관한 고증"인데 이 고증에서 중심을 이루는 것은 간부퇀이 5월 3일 밤에 선참 금사강을 강행도하했다는 것이다. 고증은 5월 2일 군위주석 주덕이 간부퇀에 금사강도강을 명령하여 류백승 참모장이 간부퇀 소속부대를 이끌어 5월 2일 주숙지를 떠났고, 간부퇀 전위련 련장 소응당의 "지혜롭게 금사강을 건너"(巧渡金沙江) 회고에 따라 5월 2일의 이튿날인 5월 3일 밤에 교평도에 이르러 그밤으로 금사강을 도강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이 고증은 5월 2일의 주덕 명령을 금사강도강의 첫 명령으로 받아들이면서 소응당의 회고를 잘못 리해하고 있는 것 같다. 중앙군위에서 금사강을 강행도하하기로 결정하고 간부퇀에 교평도나루터를 탈취하여 홍군부대의 도하를 엄호할 과업을 맡긴 것은 4월 29일이다. 소응당은 이 명령에 따라 전위련이 움직이였다고 분명히 말하였지만 고증은 이에 주의를 돌리지 못한 느낌이다. 간부퇀은 4월 29일 명령에 따라 금사강으로 강행군을 했는데 5월 2일 명령에 따라서야 금사강으로 움직이였다고 하니 오류가 생길 수 밖에 없다.

여기에서 또 하나 밝혀야 함은 간부퇀 선두부대가 5월 3일 밤에 금사강을 강행도하해서부터 5월 9일까지를 중앙홍군의 교평도도강일로 지적한 부분이다. 사실 5월 3일부터 5월 9일까지 7주야는 홍1방면군의 1군단, 3군단, 5군단과 중앙기관이 금사강을 전격도강한 걸 가리킨다. 간부퇀 선두부대의 첫 강행도하가 첫 시작이라면 이날은 5월 3일이 아닌 5월 1일 밤이다. 늦어도 5월 2일을 초과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