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광인 련재작ㅣ중국혁명 속 우리 겨레 혁명가들(관내편) - 125
发布时间:20-11-13 10:07  发布人:金卓    关键词:   

소응당이 보는 4월 하순 운남의 날씨다. 소응당이 말하는 붉은 꽃은 판즈화(攀枝花)를 말하는데 해마다 봄과 여름이 바뀌는 계절이면 운남과 사천 변계일대의 금사강 량안에는 어디나 붉디붉은 판즈화가 피여 타오르는 불길을 방불케 한다. 홍군이 금사강 쪽으로 움직이던 그 시절은 마침 판즈화가 한창 피여나는 시절이라 소응당은 자기가 보고느낀 감수를 그대로 한편의 회고글에 담고 있었다.

그러던 4월 28일인가  깊은 밤에 소응당은 보초소를 검사하며 보초병과 보초상황을 묻다가 가까이 중앙수장의 주숙지에서 걸어나오는 주은래 부주석을 만나게 되였다. 소응당은 그 때까지도 쉬지 않고 있던 주은래의 청에 의해 지주의 장원으로 된 주숙지에 들어서니 주은래 부주석은 5련의 학원들이 지금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다. 소응당은 토성전투에서 상망이 있긴 했으나 지금도 120여명이라고 말했다.

이에 주은래 부주석은 5련의 행군정황, 학원들 정서, 무기장비 등을 일일히 묻다가 "당신들 5련은 준의와 토성에서 아주 잘 싸웠습니다. 이 영광을 계속 빛내야 합니다"라고 독려하였다(《금사강의 기억》, 운남인민출판사, 2006년 9월 출판, 제78-79페이지). 하지만 그 때까지도 소응당은 중앙군위 지도자의 배려하고 생각했지 5련에 이제 곧 중요한 과업이 떨어지리라고는 생각지 못하였다.

 

 

제18편 금사강

4월 29일 명령

1

 

5련을 망라한 간부퇀의 학원들은 부대의 휴식과 그 동향을 알 수 없어(곤명을 치게 될가? 금사강을 돌파하게 될가?) 저마다 궁금해났다. 적의 부대가 박근하고 있다는 소문이 들리는데 부대는 사흩날 오전까지도 출발명령을 받지 못하였다. 전사들은 불안과 초조에 휩싸였지만 양림은 아직 중앙군위의 정식명령이 없는 이상 금사강 강행 도하를 터뜨릴 수는 없었다. 그는 전사들에게 모택동이 홍군을 령도하는 한 국민당부대의 추격포위에서 꼭 벗어날 수 있으며 북상항일은 드팀이 없다, 중앙수장들이 바삐 보내는걸 보아 중요한 결책이 무르익고 있음이 틀림없다고 이야기하였다.

사흩날 오전의 1935년 4월 29일. 이날 점심 간부퇀 퇀부주숙지는 간부퇀의 련과 영 간부들, 중앙기관의 지도동지들로 빼곡하였다. 이날 중앙군위에서는 금사강을 강행도하하기로 결정하고 간부퇀에 교평도나루터를 탈취하여 홍군부대의 도하를 엄호할 과업을 맡기였다. 이 과업을 진갱 퇀장이 명령조로 선포되였다. 그제서야 3영 5련 련장 소응당은 한 밤중 주은래 부주석이 자신을 만나 나눈 이야기의 함의를 알게 되였다. 이날 중앙군위의 결정을 접하고 간부퇀 지도자들인 진갱, 송임궁, 양림 등은 먼저 토의를 거쳐 간부퇀 간부회의를 소집하였었다.

사실은 이러하였다. 4월 29일에 앞서 중앙홍군의 금사강에로의 움직임은 장개석을 긴장하게 만들었다. 장개석은 운남성 정부주석 겸 ‘토벌’군 제10로 총지휘인 룡운(龙云)에게 보낸 4월21일의 급보(特急)에서 이미 10개 퇀 이상 병력을 배비하였으니 오늘과 래일 사이 배치가 끝날거라고 너털웃음을 짓더니 4월 26일엔 또 룡운에게 홍군이 곡정으로 전진하고 있다는 통지전보를 보내면서 오전 10시 비행기로 정찰한 데 의하면 홍군 약 4000~5000명이 바로 운남 좌사(左舍)에서 곡정(曲靖)방향으로 움직이고 있고 그 후위는 아직도 좌사 부근에 있으니 평이(平彝)부대에 곡정으로 진출하여 소멸하라고 급보를 띄웠다고 알리였다.

그러던 장개석은 홍군의 주력부대가 금사강으로 진격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화들짝 놀랐다. 뒤늦게 장개석은 홍군의 목적이 귀양 진출도 아니고 곤명 진출도 아니며 필연코 금사강을 도강하려는데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1935년 4월 28일, 장개석은 급기야 룡운에게 운남 교가(巧家)에서 원모(元谋)에 이르는 모든 도강자료들을 집중관리할데 대한 급전을 날리면서 도강에 리용될 수 있는 나루배, 선박, 대나무 등을 엄밀하게 집중시키거나 태워버리며 금사강을 봉쇄해야 한다고 엄명을 내리였다(134, 《금사강의 기억》, 운남인민출판사, 2006년 9월 출판, 제297페이지). 이 엄명에 따라 금사강변의 적들은 모든 배들을 북안에 끌어가거나 물에 잠겨버리거나 태워버리였다.

 

2

정세는 단번에 험악해졌다. 금사강을 도강할 배들이 없거나 부교를 놓을 수 없거나 시간이 지체되여 홍군이 금사강을 도강하지 못하고 적들에 의해 대활보로 선회할 여지도 없는 심산협곡에 몰린다면 그 후과는 상상하기도 어려웠다. 이런 험악한 정세를 눈앞에 두고 중앙군위는 4월 29일 급, 급전—<우리 군이 신속히 금사강을 도강하여 사천 서부에 쏘베트구를 건립할 데 관한 지시>를 각 홍군부대에 띄우면서 신속한 행동에 들어갔던 것이다.

사천 개현출신(오늘의 중경시 개현)으로 홍군 총참모장인 류백승이 전군의 도강을 통일지휘하기로 결정하였다. 중앙홍군은 좌, 중, 우 3로로 나뉘여 지체없이 금사강 쪽으로 강행군을 개시하였다. 홍1군단이 좌로로 행군하고 홍3군단이 우로로 행군하였다. 5군단과 간부퇀은 중앙종대—우로를 이루고 류백승 총참모장이 직접 령솔하였다. 이에 따라 좌로는 운남 원모 룡가나루터(龙街渡口)로 도하하고, 3군단은 홍문나루터(洪门渡口)로, 군위종대는 교평도나루터로 도하하기로 결정되였다.

교평도란 이름은 중문으로 교평도(皎平渡)로 통한다. 그러나 원래의 이름은 희고 밝다는 의미의 교(皎)자로 된 교평도(皎平渡)가 아니라 토벌하다, 소탕하다, 섬멸하다의 뜻을 가진 초(剿)로 된 초평도(剿平渡)였다. 중문으로 뜻은 다르나 같은 발음의 "jiao"로 되지만 조선어로 번역하면 하나는 교이고 하나는 초이다. 그 원인을 알자면 청나라 함풍 10년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청나라 함풍 10년이면 기원 1860년, 그 때 운남 대리에는 두문수가 건립한 농민봉기정권—대리정권(1856-1872)이 존재하고 있었다. 두문수(杜文秀, 1827-1872)는 청나라 함풍, 동치 년간 운남 회족무슬린봉기의 수령으로 이름난 사람이다. 1860년 1월 신임 운귀총독 장량기(张亮基)는 총병 저극창(褚克昌)을 운남제독으로 하고 운남 서부 군무를 다스리게 하였다. 저극창이 군사를 일으켜 회족봉기군을 대대적으로 진공하자 두문수는 전동, 전남 회민봉기수령 마덕신(马德新)에게 편지를 보내여 군사지원을 바랐다. 이에 운남 금사강변의 쫭족동포들도 운남 대리 두문수의 회민봉기군에 가담하였다.

후에 청나라 군대가 대거 동원되여 운남 대리정권을 진압하고 운남 금사강 교평도 일대의 김토사와 결탁하여 당지 봉기무장을 진압하면서 나루터 이름을 초평도(剿平渡)라고 불렀다. 당지 사람들은 토벌하다는 초(剿)가 극도로 싫어서 아예 교평도(绞平渡)로 바꾸어버렸다. 해방후 정무원의 <민족기시지명 청리개정 통지>에 따라 교평도 이름을 정식으로 교평도(皎平渡)로 개명하였다(135, 《소지붕, 홍군장정 회리를 지나다》, 2007년 1월 출판, 제31페이지).

 

3

홍군대오가 운남 록권현(禄劝县) 북부의 한 산간마을에 이르렀을 때 군위지도자들인 주은래와 류백승은 함께 간부퇀으로 와서 교평도나루터로 금사강을 강행도하할 작전계획을 상세히 짰다. 그 때 교평도 이름은 중문으로 교평도(绞平渡)였다. 주은래는 금사강 강행도하의 유리한 조건을 힘주어 말한 후 부딪칠 수 있는 어려움에 대해서도 빠뜨리지 않았다. 최악의 어려움을 두고 한 주은래의 지시정신은 대체로 아래와 같다.

만약 강행도하후 우리 군 후속부대가 따르지 못하고 나루터가 도로 적들에게 점령된다면 금사강을 건넌 선두부대와 홍군주력부대와의 련계가 끊어지게 됩니다. 그러면 간부퇀은 독립작전하여야 하는데 한단계의 유격과정을 거치며 방법을 대여 홍군주력부대와의 련계를 가져야 합니다(136, 《송임궁회고록》, 해방군출판사, 2007년 8월 제2차 인쇄, 제59페이지).

한편 당중앙책임자 장문천도 간부퇀에 와서 동원보고를 하였다. 간부퇀의 진갱, 송임궁, 양림 등은 토의를 거쳐 제3영을 선견지대(선견영)로 하고 5련을 전위련(前卫连)으로 하기로 결정하였다.

홍군이 도하해야 할 구간 금사강은 사천 회리현(会里县)과 운남 원모현(元谋县) 변계의 천험지대를 흐른다. 게다가 홍군이 가야 할 280리 구간길은 가파로운 산비탈이여서 까딱하면 천야만야 골짜기에 굴러떨어질 판이였다. 간부퇀 참모장으로서의 양림은 이 점을 너무도 잘알고 있있다. 교평도 량안의 나루터를 통제하고 금사강을 건느는 것이 부대 전체가 수십만 적들의 포위, 추격, 제지, 차단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길이고 전략적 이동에서의 결정적 의의를 가질 중대한 승리라고 볼 때 양림은 온 몸에 힘이 솟았다.

선견지대 전위련을 선두로 한 간부퇀은 두 갈래로 나뉘여 금사강을 향해 동시에 움직이였다. 한갈래는 정위 송임궁이 거느린 제3영 선견지대로서 군위 총참모장 류백승이 직접 지휘하였다. 다른 한갈래는 퇀장 진갱과 참모장 양림이 이끄는 간부퇀 후속대로서 2개 보병영과 1개 특과영, 상간대로 이루어졌다. 이는 홍군장정이 시작된 이래 중앙군위간부퇀이 처음으로 집행하는 단독 전투과업이였다.

처음 간부퇀 장병들의 회고록을 주의하여 볼 때 간부퇀 두갈래 대오중 어디에서도 양림의 행적을 찾을 수 없었다. 간부퇀 정치부주임 막문화의 회고문—《'5.1'의 전후》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필자가 본 책은 사천인민출판사에서 2007년 6월 제5차(첫 출판은 2005년 5월 )로 찍어낸 책—《중국로농홍군 장정경력기》였다. 어디에서도 양림 행적을 더듬을 수 없어서 무척 유감으로 생각했는데 해방군문예출판사에서 2007년 2월 제2차(첫 출판은 2006년 9월)로 찍어낸 장정회고문—《홍군장정기》에 실린 막문화의 회고문 《'5.1'의 전후》를 다시 보고 놀라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