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광인 련재작ㅣ중국혁명 속 우리 겨레 혁명가들(관내편) - 124
发布时间:20-11-13 10:05  发布人:金卓    关键词:   

전군이 도하한 뒤 간부퇀은 중앙군위를 따라 적수하 서쪽 사천 남부지대에서 행동하였다. 중앙홍군은 적들에게 북으로 장강을 건넌다는 가상을 준 뒤 돌연히 방향을 개변하여 3월21일 밤부터 22일 새벽까지 다시 동으로 움직이며 귀주의 이랑탄, 구계구, 태평도 나루터로 적수하를 건너섰다. 중앙홍군의 네번째 적수하 도하이다. 홍군은 동으로 움직일듯 하다가 신속히 남으로 진군방향을 돌리였고 남쪽으로 오강을 다시 도하하며 수십만 적군을 전부 오강 북쪽에 팽개쳐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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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으로 오강을 돌파할 때 간부퇀의 제3영이 오강에 부교를 놓을 과업을 맡았다. 양림은 제3영을 이끌고 이 과업을 출중히 해내였다. 간부퇀은 지시에 따라 후위를 지켜선 5군단이 도하한 후 부교를 뜯기로 했는데 5군단이 다른 나루터로 오강을 도하했다는 말과 군위 한 참모의 구두명령에 좇아 부교를 뜯어버렸다. 숙영지에 이르러 이 일을 군위 총참모장 류백승한테 회보할 때 주덕과 주은래도 곁에 있었다. 평소 거의 성낼 줄 모르는 주덕은 버럭 성을 내며 5군단은 오강을 건넜으나 9군단이 아직 건너지 않았다며 펄쩍 뛰였다.

명령에 의해 간부퇀 제3영과 공병련은 밤도와 40리를 달려가 오강에 다시 부교를 놓아야 했다. 주덕총사령은 래일 아침 7시까지 9군단이 오지 않으면 부교를 뜯으라고 지시하였다. 이튿날 아침 7시까지 기다려도 9군단이 나타나지 않으니  간부퇀은 다시 부교를 뜯을 수 밖에 없었다. 송임궁정위가 이끄는 대오는 이미 떠난 홍군대오를 좇아 2~3일 길을 다그쳐서야 주력부대를 따를 수 있었다.

4차 적수하 도하과정에서 있은 군위간부퇀의 행동모습이다. 이런 행동모습 추적을 통해 우리는 양림 참모장의 발자취를 장정흐름에 따라 추적하여 볼 수 있다. 장정길의 양림을 직접 회고한, 홍군장령들과 관련 회고문은 별반 보이지 않는 현실이다. 허나 간부퇀의 행동모습들에서 양림의 발자취를 그려볼 수 있으니 양림은 간부퇀의 참모장으로서 제3차와 제4차 적수하 도하와 다시 오강 도하에서 나름의 역할을 남김없이 발휘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하기에 《동방매력-장정과 외국인》을 써낸 소현사는 이 책에서 장정에 참가한 리덕, 홍수, 양림 등 몇몇 외국인 전기를 다루면서 양림 전기의 적수하도하와 오강도하 부분에서 이렇게 평가를 내리고 있다. 

홍군간부퇀 장병들이 자호감을 느끼는 하나는 그들의 참모장 필사제가 계략이 뛰여나고 잘 싸우는 참모장일 뿐만 아니라 두려움 모르는 보통 전투원이라는 것이다.(소현사 저, 《동방매력-장정과 외국인》, 중공당사출판사, 2006년1월 출판, 제152페이지)

양림은 홍군대오내에서 보기드문 국내외6진군사학교(六进军校) 출신이다. 그런 양림이다 보니 "계략이 뛰여나고 잘 싸우는 참모장"이라는 평가를 받을 만도 하다. “두려움 모르는 보통 전투원”이라함은 매차의 전투나 과업이 떨어질 때마다 홍군장령이라는 틀거지가 없이 언제나 진두에서 나아가기 때문이다. 토성전역에서 그러하고 2차준의전역에서 그러하고 3차와 4차 적수하도하에서 그러하지 않았던가.

모택동이 친히 지휘한 장정도중의 귀주 경내 4차 적수도하는 운동전의 빛나는 전범(典范)으로 불리운다. 중앙홍군은 4차 적수도하를 거쳐 운남으로 진군하여 금사강을 강행도하하여 북으로 사천땅에 들어서는 길을 열어놓았고, 수십만 적군의 포위, 추격, 저지, 차단에서 벗어나 홍군을 사천, 운남, 귀주 변계지대에서 소멸하려던 국민당반동파의 행동계획을 철저히 분쇄하여 버렸다.

홍군의 4차 적수하도하를 총화하면서 내린 준의회의기념관의 이 결론을 개괄적으로 옮겨 보았다. 이 4차 적수하도하에 우리 겨레 양림, 무정 등 한패의 조선인 홍군장병들이 참가하였다. 

 

4월 하순의 운남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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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홍군의 주력부대와 그 주력부대 속의 간부퇀은 남으로 오강을 건넌 후 거짓으로 귀양을 진공하고 곤명에 박근하는 모습을 보이였다. 그 목적은 적들을 금사강에서 멀리 팽개치고 그 사이 금사강을 건너 북상하자는데 있었다. 홍군이 세번째로 적수하를 건널 때 모택동동지가 간부퇀을 칭찬하면서 "운남의 적을 끌어내면 곧 승리"라고 하신 것은 바로 이런 연유에서였다.

그 때 장개석은 무척이나 급줄이 났다. 1935년 3월 하순 장개석은 친히 귀양으로 날아가서 국민당의 부대들을 직접 지휘하면서 군용비행기도  투입하고 부대들도 집중하면서 압도적인 우세로 홍군을 일망타진하려고 시도하였다.(《금사강의 기억》, 운남인민출판사, 2006년 9월 출판, 제258페지) 운남군벌부대를 황망히 나서게 했고 설악의 부대와 호남의 부대를 귀양 동쪽의 여경(余庆) , 석천(石阡) 등지에 진을 치게 한 것이 그 한 조치라 하겠다. 하지만 장개석은 홍군 모택동의 지휘에 따라 움직이는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홍군 제1군단이 귀양 동남쪽 룡리(龙里)를 포위하면서 허장성세로  적들을 미혹에 빠뜨릴 때 홍군의 주력은 운남 쪽으로 빠지며 귀양으로 진출하는 운남군(滇军)과 서로 어긋나는 진군로를 택했다. 홍군 총참모장 류백승은 먼 후날 장정을 회고하면서 이 때의 모택동의 전술을 "성동격서하는 령활한 전술"이라고 높이 평가(《금사강의 기억》, 운남인민출판사, 2006년 9월 출판, 제15페이지)하였다.

1935년 4월 하순, 중앙홍군은 세갈래로 나뉘여 운남방향으로 진군했다. 이 시기 모택동은 너무나 분망히 보내며 피로한 데서 조금이라도 더 잠을 자려고 늘 군위종대의 뒤에서 행동하며 많은 시간을 간부퇀과 어울리였다. 그때 련며칠 비가 내리였다. 말을 타고 행동하는 모택동은 비 속을 헤치며 깊은 우려를 나타냈다. 송임궁의 회고에 따르면 모택동은 그 우려를 진갱과 송임궁 등에게 터놓았다. 

"지금 우리는 적의 주력을 선후하여 귀양과 곤명에 돌리였습니다. 이는 우리가  돌연행동을 행하는 데 편리하여 신속하게 금사강 나루터를 공략하고 전군이 금사강을  도하하며 적들을  멀리 뿌리칠 수 있습니다. 이 며칠간 내리는 비는 좋지 않습니다. 강물이 불어 우리의 도강에 영향을 끼칠가봐 걱정입니다. (송임궁회고록, 해방군출판사, 2007년 8월 제2차 인쇄, 제58페이지)"

모택동의 말씀 요지이다. 이 말씀을 참모장인 양림도 같이 들었는지는 모르겠으나 퇀장과 정위가 아는 일을 참모장이 모를 리가 없다. 간부퇀의 지도자들은  우려를 띤 모택동의 말씀에서 최근 홍군부대가 련속부절히 적들을 귀양과 곤명 쪽에 뿌리친것은 금사강을 강행도하하여 북상항일하기 위해서임을 비로소 알게 되였다.

중앙홍군은 귀주의 북반강(北盘江), 즉 오늘의 귀주 관령(关岭)과 청륭(晴隆)사이 호곤고속도로(沪昆高速)를 가로 흐르는 북반강을 도강한 후 4월 27일 운남의 첨익(沾益)과 곡정(曲靖)을 공략하였다. 당과 홍군의 모택동, 왕가상, 주은래,  주덕 등 동지들은 곡정의 한 마을 주숙지에서 관련회의를 소집하고 북으로 금사강을 도강할 문제를 처음으로 토의하였다. 아래 이분들의 주요 말씀요지를 그대로 적어본다.

모택동: 이 같이 큰 테두리를 돌아 오면서 지금은 끝내 두서가 잡히여 북으로 금사강을 건널 시기가 왔습니다. 또, 금사강으로 가자면 교가(巧家)로 갈 수 있습니다. 라병휘의 9군단이 그곳에 있지만 결점은 먼 편이고 적들과는 가까운 편입니다. 원모로 가면 가까운 편이지만 음페적이여야 합니다. 원모, 록권, 무정 3개현을 통과하자면 쉽게 저격을 받을수 있습니다. 도대체 어느 길로 가는것이 좋겠는지, 여러분 의론을 바랍니다.

 

주덕: 여기에는 동으로 움직이는 척 하다가 서로 향하는가 아니면 서로 움직이는 척 하다가 동으로 향하는가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나루터는 꼭 잘 선택하여야 합니다.

모택동: 적들은 홍군이 교가로부터 도강할 거라 판단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응당 장계취계하여 동으로 움직이는 척 하다가 서로 움직이는 모습을 나타내여 적들이 빈틈을 타서 빨리 금사강을 도강하여야 합니다. 내가 얼마 전 운남의 적을 끌어내면 곧 승리라고 말했지만 지금은 금사강을 도강하면 곧 승리입니다.

왕가상: 래일 곧 이곳을 떠나서 록권, 무정 방향으로 전진해야 합니다.(소지붕, 《홍군장정 회리를 지나다》, 2007년 1월 출판, 제25-26페이지)

그러나 그 때까지도 홍군에는 그럴 듯한 지도 하나 없어 어려움이 많았다. 그럴 때 군위총부 관리과 과장 류정금(刘定金)이 큰 종이말이를 메고 들어섰다. 알고 보니 홍군부대가 길에서 적들의 군용차를 발견하고 습격하였는데 차에는 설악(薛岳)의 부관 류검추(刘剑秋)가 룡운이 설악에게 보내는 10장의 군용지도와 많은 운남백약이 실려 있었다. 모택동은 너무도 기뻐 옛날에는 류비가 사천에 들어와 장송(张松)한테 지도를 바치더니 오늘은 홍군이 사천에 들어가려 하니 룡운이 지도를 바친다며, 지도를 얻는것이 허다한 무기를 로획하기보다 더 쓸모있다고 했다.

 

이날 회의는 동으로 움직이는 척 하다가 서로 가는 책략을 선택하였다. 때가 바로 4월 27일 홍군이 운남 첨익과 곡정을 점령한 직후였다. 간부퇀은 중앙기관과 함께 운남 곡정의 한 마을에 숙영하게 되였다. 이튿날도 부대는 계속 마을에 머물렀다. 4월 하순의 운남은 벌써 날씨가 아주 무더워났다. 이 더위를 두고 간부퇀 제3영 5련 련장 소응당(肖应棠)은 한편의 회고글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4월의 운남은 날씨가 너무 더워 군복 한벌을 입고도 땀에 옷이 착 붙을 지경이였다. 네모반듯한 논판의 벼포기들이 바람에 하느작거리며 마치 우리들을 손저어 반가이 맞이하는듯 하였다. 길 량켠의 산들에 붉은 꽃들과 록음이 우거지고 벌떼들이 윙윙 날아옌다. 그야말로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아름다운 봄이다.(《금사강의 기억》, 운남인민출판사, 2006년 9월 출판, 제78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