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광인 련재작ㅣ중국혁명 속 우리 겨레 혁명가들(관내편) - 123
发布时间:20-10-28 07:00  发布人:金卓    关键词:   

2월 25일, 홍5군단과 홍9군단은 동재 서북쪽에서 적들을 막아서고 홍1군단과 홍3군단은 준의의 북대문인 루산관의 적을 섬멸하고 준의성으로 진격하라는 중앙군위의 명령을 받고 홍3군단 군단장 팽덕회와 정위 양상곤의 통일지휘하에 그날로 루산관 진공전투를 벌이였다. 팽덕회의 명령으로 3군단의 제13퇀이 루산관 주공을 담당하고 1군단의 제1퇀이 루산관 동쪽으로의 우회를 맡아나섰다.

루산관은 원명이 루관(娄关)이고 후에 태평관(太平关)으로 불리였다. 준의에서 북으로 50킬로미터 상거한 대루산맥(大娄山脉)의 주봉으로서 해발 1576미터를 기록하는 험준한 지대로 알려진다. 루산관은 또 준의와 동재 2개 현의 변계지대에 위치한 귀주 북쪽의 인후로서 예로부터 금북제1험요(黔北第一险要)로 불리면서 '일부당관, 만부막개(一夫当关,万夫莫开)'의 명나라 시절 옛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간부퇀도 명령을 받고 동재를 떠나 루산관으로 움직이였다. 간부퇀은 하루사이 120리 강행군을 하면서 루산관에 이르렀고 간부퇀의 상간대는 간부퇀을 떠나 대장 소경광의 지휘하에 처음은 동재현성에 남아 경계임무를 수행하다가 루산관전투에 뛰여들었다. 참모장 양림은 퇀장과 정위를 협조하여 간부퇀의 1영, 2영, 3영, 특과영를 지휘하면서 홍1군단, 홍3군단, 홍5군단과 함께 국민당군 주혼원부대(周浑元部)와 오기위(吴奇伟) 2개 사 추격전에 가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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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은 1935년 2월 28일이였다. 오전 10시에 적 오기위부대의 59사 한한영부(韩汉英部)가 홍화강을 지켜선 제3군단 11퇀 진지를 맹공하였다. 11퇀의 장병들은 목숨으로 진지를 사수하면서 벌써 적들의 진공을 두번이나 물리쳤다(《준의회의 회의장으로 가다》, 중앙문헌출판사, 2009년 9월 출판, 제147페이지). 오전 11시에 적들은 진공방향을 바꾸어 홍화강 우익 로아산을 지켜선 홍3군단 제10퇀 진지를 진공하였다. 오후에는 적 93사 당운산부(唐云山部)도 가세하여 륜번으로  맹렬한 공격을 들이댔다.

적기 2대도 전투에 가담하여 홍화강, 로아산, 벽운봉을 비롯한 주위 수십리지대는 온통 불바다를 이루었고 총소리, 포소리, 멸적의 함성이 하늘땅을 뒤흔들었다. 로아산 주봉에서는 육박전까지 벌어져 적들이 무리로 쓰러졌다. 홍군부대도 피의 대가를 지불하여야 했다.

치렬한 혈전중 제3군단 제10퇀 퇀장 장종손 퇀장이 부상을 입고 쓰러지고 제10퇀 참모장 종위검 참모장이 희생되였다. 종위검 참모장은 이미 앞에서 밝힌 바이지만 1935년 1월, 준의회의직후 간부퇀 참모장 직책에서 물러나 홍3군단 제5사 참모장으로 부임하였으며 2월초 운남 짜시에서 부대를 축소편성할 때 홍3군단 제10퇀 참모장으로 임명되였었다(《준의회의 회의장으로 가다》, 중앙문헌출판사, 2009년 9월 출판, 제114페이지).

준의의 옛성(老城) 서쪽으로부터 남쪽에 이르는 서남지대는 부후산(府后山), 삽기산(插旗山), 홍화강(红花岗), 로아산(老鸦山), 벽운봉(碧云峰) 등 산과 봉우리들로 쭈욱 뻗어 있다. 그중의 로아산은 홍화강과 이웃하고 있는데 로아산은 해발이 1053미터이고 이웃한 홍화강은 해발이 1002미터라고 한다.

준의를 두번째로 진격하는 준의대첩이 바로 이곳 준의의 서남지대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홍3군단 제10퇀은 퇀장이 부상을 입고 참모장이 희생되니 황극성(黄克诚) 정위 한사람이 전투를 지휘할 뿐이였다. 력량상의 현저한 대비로 하여 로아산의 주봉은 끝내 적들에게 함락되고야 말았다.

로아산 주봉 함락은 홍3군단의 다른 진지들과 준의성의 안전에 엄중한 위협이 되였다. 군단장 팽덕회가 친히 전연진지에 나타나 로아산 주봉 탈환전투를 지휘하였다. 그러나 제 11퇀 3영이 피의 대가를 내면서 거듭 진공하고 제10퇀도 몇차례 돌격전을 벌이였지만 로아산 주봉을 의연히 탈환하지 못하였다. 이 위급한 찰나 주덕이 나타나 친히 전선지휘에 나서면서 홍군부대를 독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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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중앙군위에서는 급급히 군위간부퇀을 북쪽지대로부터 남쪽지대로 전이시켜 홍11퇀을 도와 로아산 주봉을 진공하도록 하였다. 양림은 진갱 퇀장 등과 함께 간부퇀을 지휘하여 적들과 로아산 주봉 쟁탈전을 벌이며 진두에서 피의 혈로를 헤치였다. 그 진두의 간부퇀 장병들 속에는 양림이 나아가고 있었다. 이 때의 력사현실을 두고 준의회의기념관에서 편찬하고 중앙문헌출판사에서 출판한 《준의회의 회의장으로 가다》에서는 "간부퇀의 용사들은 끝끝내 로아산 고지를 탈환하고 말았다"고 높이 평가하고 있다(《준의회의 회의장으로 가다》, 중앙문헌출판사, 2009년 9월 출판, 제148페이지).

간부퇀이 홍11퇀과의 배합 속에서 로아산 주봉 탈환전을 벌일 때는 이미 밤이고 장대같은 큰비가 억수로 쏟아졌다. 드디어 홍1군단은 밤의 어둠을 타서 로아산과 홍화강을 제압하고 여기저기 적의 2개사를 로아산 산록에 몰아넣었다. 오기위는 93사 잔여부대 2개 퇀쯤을 이끌고 오강 쪽으로 달아나고 왕가렬은 잔여부대를 이끌고 신창 쪽으로 달아났다. 홍군은 승승장구로 오강가에까지 추격하여 오기위의 잔여부대 대부분을 섬멸하는 전과를 올리였다.

준의전역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1935년 1월초 준의를 처음 공략할 때 홍군은 이미 루산관전투 등 1차전역을 벌이여 휘황한 승리를 거두었었다. 이번은 두번째 전역으로서 중앙홍군은 5일간에 동재, 루산관, 준의 등지에서 적 2개 사와 8개 퇀을 무찌르며 적 2400여명을 살상하고 3000여명을 포로하는, 장정이 시작된 이래 가장 빛나는 승리를 거두었다(준의회의 회의장으로 가다, 중앙문헌출판사, 2009년 9월 출판, 제149페이지).

준의를 공략하는 이 2차전역에서 양림 등을 진두로 한 군위간부퇀은 토성전역에 이어 두번째로 준의 로아산 주봉 탈환에 뛰여들어 불멸의 위훈을 세웠다. 이는 력사적 진실이면서도 토성전역과 준의전역은 말 그대로 피로 얼룩진 격전 또 격전이여서 우리 홍군부대가 받은 손실도 적지 않다. 그중 간부퇀만 보아도 토성전역에서만 110여명이 사상자를 내는 대가를 치렀다. 아래 간부퇀 정위 송임궁이 모택동동지께 회보하며 나눈 대화를 한마디씩만 적어본다.

"간부퇀의 학원들은 모두 련과 패 이상 간부들입니다. 한명의 간부 양성도 쉽지 않은데 이렇게 쓰면 대가가 너무나 큽니다."

"그렇습니다. 간부퇀 학원들을 쓸 때는 써야지만 이렇게 써서는 안되겠습니다. 앞으로 주의해야겠습니다(《송임궁회고록》, 해방군출판사, 2007년 8월 제2차 인쇄, 제53-54페이지)".

중앙홍군의 통솔자 모택동은 간부퇀의 손실을 두고 애석해마지 않았다. 그러나 사생결단의 위급한 관두에서는 당중앙, 중앙군위 안전과 경위, 홍군부대들에 간부를 수송할 책임을 진 간부퇀이라 해도 내세우지 않으면 안된 현실이였다. 모택동이 중앙홍군을 이끌어 네번 적수하를 건너는 기간 간부퇀은 토성전역과 준의전역에 뛰여들었는데 여러 사관학교 출신인 간부퇀 참모장 양림은 용맹을 떨쳤다.

적수하 오강 다시 넘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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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3월 16일, 모택동-주은래-주덕은 중앙홍군을 이끌어 귀주 모태 부근에서 세번째로 적수하를 넘으며 사천 남부로 진출하여 북으로 장강을 도하할 듯한 자태를 보이였다. 간부퇀 상간대 대장 소경광의 회고(《사도적수전역 경력기》, 중앙문헌출판사, 2010년 9월 출판, 제134페이지)에 따르면 중앙홍군의 세번째 적수하 도하부교는 상간대와 공병련이 한 일인데 세번째 적수하도하를 앞두고 상간대는 명령을 받고 조용히 준의를 떠나 인회로 향하였다. 홍군의 통신부문은 적들의 전화도청에서 인회를 지켜선 적군이 지방부대 한개련 밖에 없다는 정보를 수집하였다고 한다.

상간대 대장 소경광과 정위 막문화(莫文骅)가 상간대와 공병련을 지휘하여 밤도와 80~90리 길 산길을 헤치였다. 상간대와 공병련은 성벽진공시 쓸 사다리와 부교설치기재 등을 지니였지만 이른 새벽에 어김없이 인회에 이르러 신속히 인회현성을 점령하였다.  보병련이 남아 인회현성을 지켜설 때 공병련은 30리 밖의 모태로 달려가 상간대의 엄호하에서 적수하에 부교를 놓아 중앙홍군의 세번째 적수하 도하의 순리를 담보하였다.

 

세번째 적수하도하를 둘러싼 간부퇀의 역할은 이에만 그치지 않았다. 간부퇀 정위 송임궁의 회고에 따르면 중앙홍군이 귀주 모태 부근에서 세번째로 적수하를 넘을 때 간부퇀은 홍군 도하지점인 적수하 량안의 경계와 엄호과업을 짊어졌다.

그 때 간부퇀 퇀장 진갱과 정위 송임궁이 전군의 도하사령과 정위를 맡았다. 양림은 그런 퇀장과  정위와 힘을 합쳐 간부퇀을 지휘하며 과업수행에 전력하였다. 한편 중앙군위의 명령에 좇아 먼저 간부퇀 1개영을 강 서쪽에 파견하여 적수하 도하후의 중앙군위의 행동안전을 지켜섰다.

 

그 때 모택동은 간부퇀 공병련이 놓은 부교를 건넌 뒤 “공병련은 방법이 있습니다. ...우리가 세번째로 적수하를 건너 운남의 적을 끌어내면 곧 승리입니다.”라고 칭찬해마지 않았다. 주덕도 칭찬속에 뛰여들었다. "공병련을 조직할 때 내가 말했지요. 공병은 아주 중요하고 1천년 전에도 있었다고 말입니다. 공병은 산을 만나면 산을 헤치고 강을 만나면 다리를 놓습니다. 이 과업은 아주 영광스럽고도 간거하지요(소현사 저, 《동방매력—장정과 외국인》, 중공당사출판사, 2006년1월 출판, 제151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