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광인 련재작ㅣ중국혁명 속 우리 겨레 혁명가들(관내편) - 122
发布时间:20-10-23 06:39  发布人:金卓    关键词:   

2011년 7월 8일부터 8월 5일까지 사이 필자는 여름방학 시간을 타서 두번째로 운남, 사천, 귀주 경내 홍군장정 현지답사길에 올랐다. 두번째 답사 첫 답사지를 운남 짜시로 잡고 귀주성 소재지 귀양에 선참 들어섰으나 귀양에서 어떻게 운남의 최북단 위신현으로 가야할지를 모르겠다.

귀주성과 운남성 지도를 보면 귀양에서 렬차를 타고 안순-륙반수 등지를 지나 조통시로 갔다가 조통에서 뻐스로 위신에 가는 길, 귀양에서 귀주성내 금서, 대방 등지를 경유하여 귀주와 운남 사이로 뻗어들어온 좁은 지대의 사천 서영까지 갔다가 서쪽으로 꺾으며 위신에 가는 길, 아니면 귀양에서 운남 접경지대인 귀주 필절시까지 갔다가 귀주-운남 변계를 넘어 위신에 가는 길 세 갈래로 잡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운남의 조통과 사천의 서영 쪽은 둘러가는 길인 데다가 운남 위신현과 가까운 사천 서영 사이에는 어떤 신작로 표시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택한 길은 중간길이고 지름길인 필절시를 통한 로정이였다. 귀주 필절시와 운남쪽 변계에도 어떤 신작로 표시가 보이지 않았으나 필자는 아무리 2개 성으로 갈라진 지구라 해도 지리적으로 가까운 현과 시들 사이에는 지도에 나타나지 않는 지방길들이 필경 통해 있으리라고 믿었다.

드디어 2011년 7월 11일 오전 9시 귀양의 금양뻐스부에서 필절행 뻐스에 올랐다. 211킬로미터 거리를 옹근 4시간 달려 필절시 동역에 이르니 옛역(老站)인 서역으로 가보라고 한다. (음, 위신으로 가는 뻐스가 있는 모양이구나!)기쁜 마음에 필절서역으로 달려가니 위신까지 곧추 달리는 뻐스는 없고 귀주변계를 넘어 가까운 운남 진웅(镇雄)으로 가는 뻐스 뿐이다. 때는 이미 오후 3시 직전이라 현성인 진웅에 머무르기보다 지구급시인 필절에 머무르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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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2일 오전 8시 반에 운남 진웅행 뻐스가 필절을 떠났다. 이미 비가 내려 땅이 모두 축축히 젖은 상태이고 가담가담 이슬비가 계속 내리고 있었으나 개의치 않았다. 필절-진웅 사이가 70여킬로미터라니 늦어서 두시간쯤이면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게 아니다. 질러가는 길이 둘러가는 길이라고 귀주와 운남 변계의 높은 산을 넘어가는 길 가끔 수리중인 데다가 비내린 지방 신작로여서 말이 아니다. 길이 나쁜 데서 평소 길어서 3시간이면 족하다는 길을, 그것도 70여킬로미터 밖에 안되는 길을 장장 7시간이나 헤매여야 했으니 후~ 한숨만 나간다.

다행히 오후 3시 반인데도 오후 4시 10분에 진웅에서 위신까지 달리는 뻐스가 있었다. 진웅과 위신 사이는 불과 78킬로미터, 이 구간은 대체로 평탄하고 넓은 길이여서 뻐스는 2시간 만에 필자가 바라는 첫 답사의 목적지-운남 위신현성에 들어선다. 그때 그 기쁨은 이를 테가 없다. 위신현성에 주숙을 잡으니 몸이 한결 가볍고 휘휘~ 휘파람이 절로 난다. 하루 낮 동안의 지친 피로가 가뭇 사라진다.

2011년 7월 13일, 이슬비 내리는 속에서 운남 위신현 짜시진에서의 답사가 시작되였다. 아침식사를 치르기 바쁘게 짜시진의 동북가에 위치한 '짜시회의기념관', 짜시진 상가 60번지를 찾으니 오전 8시가 되지 않아 철대문이 닫겨 있었다. 철대문 밖 주변을 돌며 “짜시회의” 소개글과 주변환경을 디지털카메라에 담는데 기념관 마당에서 한사람이 다가와 철대문을 열어준다.

 

급기야 짜시회의기념관 정원에 들어서니 2층으로 된 'ㄱ'자 모양의 목조구조로 된 건축물이 나타난다. 소개글을 보니 기념관의 진렬실 면적은 2590평방미터에 달하고 오른쪽 2층이 회의장소를 비롯하여 진렬실이 4개(짜시회의 회의장소 주체진렬과 짜시진렬관 보조진렬 2개부분 포괄)이며, 170여폭의 도편사진들과 홍군 유물 70여점으로 이루어졌다.

짜시회의 자리는 원래 강서회관과 호광회관 자리로서 전체면적이 4686평방미터에 달하였다. 강서회관은 또 만수궁이라고 하고, 청 함풍년인 기원 1856년에 514평방메터의 목조구조로 지어졌다. 호광회관은 우왕궁이라고도 불리우며 청 광서4년(기원 1879년)에 336평방메터의 사합원 목조결구로 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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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로 보는 짜시회의 자리는 이렇듯 100여년의 력사를 가진 고색이 짙고 우아한 풍격의 건축물이였다. 세월 속에서 후에 지어진 호광회관은 줄곧 보전이 잘 되였으나 강서회관은 1962년에 허물고 1976년에 옛 모양대로 다시 수건함을 보인다. 모택동, 주은래, 주덕 등 동지들의 주숙터도 원 모양에 따라 회복되고 짜시회의기념관과 홍군렬사기념비 등이 새로 일어섰다.  

오늘의 짜시회의기념관은 1977년 12월에 락성되여 정식으로 대외에 개방되였다. 기념관의 관련자료는1983년 1월에 1983년 1월에 운남성인민정부의 비준으로 두번째로 비준되는 성급중점문물보호단위가 되고, 1997년 4월에 중공운남성위와 성인민정부가 첫 패의 '운남성애국주의교육시범기지'로 명명, 2001년 6월에 중공중앙선전부에 의해 “전국애국주의교육기지”로 명명된다.

 

필자는 짜시회의기념관 이모저모를 여러번 돌아보았다. 모레면 련속극 《짜시 대전환》, 즉 《짜시 1935년》 현지촬영을 시작한단다. 기념관 내외에 련속극 촬영물품과 도구들이 가득하여 오른쪽 2층에 자리잡은 짜시회의 장소를 올라가 볼 수 없었으나 필자는 1935년 2월 10일 준의회의정신 회의전달과 토론과정에서의 양림의 모습을 애써 머리에 그려 보았다. 

짜시회의기념관 답사를 통하여 필자는 짜시회의는 한번이 아닌 세번으로 모두 부동한 시간, 부동한 장소에서 열리고 모두 짜시회의로 통함을 알 수 있었다. 이런 회의장소들인 현안의 장자상과 수전채를 찾자면 거리와 교통의 불편으로 하여 하루사이에 끝내기가 어려웠다.

필자는 다시 택시를 잡았다. 제대로 현성 짜시진 서남쪽으로 17킬로미터와 40킬로미터에 각기 위치한 장자상(庄子上)과 수전채(水田寨) 회의장소와 홍군이 짜시진으로 들어서자면 꼭 거쳐야 했다는, 아찔한 절벽강산으로 이루어진 험요한 량합암(两合岩) 협곡지대를 단걸음에 돌아보았다. 짜시진에 돌아와서는 진안의 “짜시렬사릉원”을 돌아보고서야 시름을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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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놀음이 남다른 수확도 없지 않았다. 택시기사는 2011년 46세에 난다는 장씨인데 그는 필자와의 이야기에서 필자가 조선족이고 동북 연변 태생이라고 하자, 조선족이 운남 짜시를 찾은 것은 처음이라고 했다. 필자가 당년 장정중의 홍군대오에 조선인 장병 30명 가량 활동했고 그중 양림과 무정 두 장군은 조선인이라고 하자 진짜 감탄해마지 않았다. 그러면서 그는 현재 위신현 전체인구는 42만명, 현성 짜시진이 4~5만명이고 짜시진이 현성으로 된건 불과 10여년의 사실이라고 했다. 택시기사가 무척 고맙기만 했다. 

그래, 1935년의 짜시는 현성이 아닌 지방에 불과하였지. 그러던 1935년 2월초, 운남 최북단 동쪽의 이 짜시지구에 장정중의 우리 홍군대오가 나타나면서 력사의 새로운 시대를 맞이한다. 이 장절의 서두에서 보다싶이 양림 소속 간부퇀이 짜시지구에 진출한 것은 1935년 2월 6일로 알려진다.

헌데 간부퇀 정위 송임궁의 회고록은 양력을 말하지 않고 음력 12월 30일, 섣달 그믐날이라고 밝히였다(《송임궁회고록》, 해방군출판사, 2007년 8월 제2차 인쇄, 제54페이지). 홍군부대가 지금의 짜시진에 들어선 시간을 가리킨다. 이에 따라 《민속 만년력》(중국희극출판사, 2002년 10월 제2판 인쇄, 제 108페이지)을 펼치니 섣달 그믐날인 음력 12월 30일은 1935년 2월 3일로 나타났다. 2월 3일과 2월 6일 설은 어느 것이 옳은지, 필자는 구태여 밝힐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기억에 의한 회고는 이래저래 다를수도 있기 마련이 아닌가.

간부퇀 송임궁정위는 회고록에서 계속하여 섣달 그믐날 밤에 짜시에는 거위털 같은 큰눈이 밤새 내려 산이나 령이나 골골이나 모두 눈으로 덮히였다고 썼다. 우리 북방 동북에서와 같은 큰눈이 내렸다니 운남, 귀주 일대로 말하면 흔치 않은 일, 그러면 조선의 고향이나 중국 동북과 같은 큰눈을 머나먼 운남땅 짜시에서 맞이한 양림의 기분은 어떠했을가?! 짜시진 동북가의 짜시회의기념관에서 필자는 짜시의 산과 거리거리를 굽어보며 양림과 맘속 대화를 나누어보았다. 그러면 양림은 짜시회의에서 모택동의 군사주장은 전당, 전군의 행동지침으로 되였다고, 홍군은 사기백배하였다고 말한다…

 

루산관전투와 로아산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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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2월 10일 장문천이 중앙종대간부회의에서 준의회의결의정신을 전달함과 동시에 홍군 각 군단은 명령을 받고 소속부대를 축소편성하였다. 간편한 옷차림에 간편한 장비로 나서는 부대의 사기는 크게 올랐다. 2월 11일 중앙홍군은 3로종대로 나뉘여 운남 짜시지구를 떠나 적수하 이동지구로 행군하였다. 귀주 북쪽으로 진군하여 준의를 다시 점령하라는 중대한 결책에 따라 움직이는 홍군대오였다.

 

2월 18일과 20일 사이 홍1군단과 홍3군단은 귀주 습수(习水)와 인회(仁怀) 사이의 이랑탄(二郎滩)과 태평도(太平渡)에서 귀주군의 2개 퇀과 사천의 반동민단을 격패한 후 홍군 전체가 두번째로 적수하를 넘어 귀주 동재현(桐梓县)으로 진군하였다. 그 속에는 군위간부퇀과 양림 참모장도 들어있었다. 2월 24일, 홍1군단의 선두부대가 귀주 동재현성을 공략하였다. 중앙홍군의 동으로 신속한 행동은 장개석의 귀주 북쪽 군사부서를 크게 헝클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