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광인 련재작ㅣ중국혁명 속 우리 겨레 혁명가들(관내편) - 121
发布时间:20-10-21 03:17  发布人:金卓    关键词:   

토성전역은 말 그대로 생사결단의 결사전이였다. 간부퇀 정위 송임궁의 회고와 같이 "매 한걸음 내디딜 때마다 모두 피의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적들과 혈전 속에서 홍3군단과 홍5군단은 천병같은 간부퇀의 반격에 힘입어 사기백배하여 반돌격을 하였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홍1군단이 싸움터에 다달아 홍군부대는 치렬한 전투를 황혼까지 이어갔다.

벌써 홍군은 3000여명의 사상자를 내였다. 적들이 유리한 진지 등을 턱대고 증원병을 끊임없이 증파하며 완강히 저항하는 데서 적을 완전히 무찌른다는 것은 무리였다. 모택동과 주은래, 주덕 등은 적들에 중대한 살상을 주었다고 인정하면서 홍군부대가 주동적으로 싸움터에서 물러설 것을 명령하였다.

1935년 1월 28일 벌어진 귀주 토성전역은 홍군장정도중의 한차례 혈전이였다. 토성전역은 적들에게 중대한 타격을 가하며 홍군도 큰 손실을 보았으나 중앙홍군 장정사에 피동으로부터 주동으로 내디딘 첫걸음으로 대서특서되면서 홍군부대가 처음으로 적수하를 건너 운동전을 벌이는 데 보귀한 시간을 가져다주었다. 준의회의후 모택동이 친히 지휘한 이 전역은 홍군이 네번 적수하를 건너는 서곡으로 되였다. 간부퇀 참모장 양림은 이 전역에서 용맹을 떨치였다.

토성전역전적지는 오늘의 귀주성 습수현 토성진 청강파촌에 위치하고 있다. 토성진에서 동북으로 약 3킬로미터 되는 곳으로서 지금 이곳의 한 산언덕에는 로홍군전사이고 중앙군위 원 부주석인 장진장군의 필체로 된 '청강파홍군렬사기념비(青杠坡红军烈士纪念碑)'가 우뚝 솟아있다.

오늘의 토성진은 귀주성 습수현의 한개 진으로서 사천성 고란현과 귀주성 적수시 사이 적수하 중류에 위치하고 있다. 2011년 7~8월 사이 여름방학 두번째로 운남, 귀주, 사천 등지 홍군장정길 답사에 나선 필자는 이 해 7월 15일 적수시에서 택시를 잡아 타고 고성진으로 달리였다. 택시가 한시간 좀 더 달리더니 택시기사는 토성진에 이르렀다고 알린다. 그런 토성진은 적수시에서 남으로 70킬로메터 떨어진 적수하반에 자리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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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는 토성진을 꿰고지나는 중심가—'사도적수기념관(四渡赤水纪念馆)' 앞에서 멈추어섰다. 사도적수기념관 주위는 온통 고색이 짙은 거리들이였다. 토성진은 유구한 력사를 가진 천년고성이다. 토성진 소개도를 보니 기원전 111년 서한 원정6년(西汉元鼎六年)에 이곳에 벌써 평맥현(平麦县)을 설치하여 그 력사가 이미 2000년을 넘었다.

필자는 중국의 남방과 서남에서 때때로 보던 천년고성들에 이어 홍군장정답사길에서 또 하나의 천년고성을 대하니 탄복해마지 않았다. 서한 원정 때로부터 1000여년이 흐른 후날 북송 대관3년에는 자주(滋州)로 되여 인회(仁怀), 승류(承流) 2개 현을 거느렸다고 하니 토성진의 력사적, 지리적 위치를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옛 인회, 승류 2개 현 구역은 오늘의 인회시, 적수시, 습수현을 말한다. 그러다가 력사 속 어느 시대에서 사라진 모양인지 원말명초에 당지 사람들이 집 개축공사를 할 때 숱한 토성벽들을 발견하면서 '토성'이라고 불리웠다고 한다.

간단한 유래나마 토성진의 유래를 알게 되니 여기저기 보이는 옛거리들이 리해됐다. 력사가 오죽하면 오늘날 하나의 행정진 밖에 안되는 진안에 '적수하항운력사전람관', '토성고진박물관' 등 기념물들이 가득할가 싶다. 이곳은 오랜 옛날에 이미 사천의 소금이 귀주로 들어오는 중요한 부두와 집산지였다니 그럴만도 하다.

 

어디 그뿐인가, 천년고성인 이곳이 당년 중앙홍군이 모택동의 령솔하에 가까이서 청강파전역을 치르다가 감쪽같이 물러나 네번 적수하를 건넌 첫 도강지였으니 홍군의 첫 도강지로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다. 이런 곳에 “사도적수기념관”을 비롯하여 모택동-주은래-주덕의 주숙지, 홍군총사령부-총참모부 옛터,  녀홍군기념관, 토성도강기념비, 홍군1차적수하도강지, 청강파전적지 등이 우후죽숙처럼 일어서니 토성진은 말 그대로 오늘의 중국력사문화명진이요, 홍군장정의 찬란한 명주였다.

 

이날 필자는 귀주 토성진에서 토성진의 옛거리와 “사도적수기념관”을 돌아보고 곧추 택시를 타고 토성진에서 동쪽 5~6킬로미터 거리 산언덕에 웅장하게 일어선 “청강파홍군렬사기념비”를 찾았다. 바로 그젯날 토성전역이라 불리우는 청강파전투자리였다. 여러 계단들을 톺으며 기념비 아래에 이른 필자는 산언덕에서 주위를 일별하면서 홍군장정중의 청강파전투 모습, 양림의 모습을 찾아보고자 했다. 분명 보이지는 않으나 전투의 함성소리는 분명 들리는 느낌이였다.

귀로에서 필자는 다시 토성진에 들러 적수하 강반에 자리한 제1차 적수하 도강자리와 토성도강기념비, 녀홍군기념관 등을 답사하였다. 사도적수기념관에서 양림의 이름 두 글자를 찾아볼 수 없어 서운했지만 홍군장정과, 양림과 관련된 중요한 토성기념지들을 두루 현지 답사하였다는것이 중요하다고 생각되였다.

70킬로미터 밖 적수시로 돌아오는 길에서 적수시에서 남으로 58킬로미터 떨어진 적수하 제1차 원후 도강자리, 적수시에서 남으로 25킬로미터 떨어진 병안 도강자리, 적수시의  “적수홍군렬사릉원” 등지도 찾아보았다. 여러 날을 거쳐야 돌아볼 수 있는 장정관련현지들을 택시로 하루 낮도 안되는 사이에 돌아보았으니 시간을 많이 당길 수 있어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

백설에 묻힌 운남땅 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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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성전역에서 주동적으로 철거한 중앙홍군은 1월 29일, 토성진의 훈계구(浑溪口)와 토성 북쪽 가까이 원후(元厚)나루터에 이르렀고 적수하에 부교를 놓으면서 제1차로 적수하를 건너섰다. 원 북상계획대로 사천의 로주, 의빈 사이로 장강을 도하하여 장강이북 사천땅에서 홍4방면군과 회합하려 했으나 장개석이 대량의 병력을 집결하면서 홍군의 사천진출을 막아나선데서 행동방향을 개변하여야 했다.'

 

'좌'경 지도자들의 통치하에서는 상상도 못한 일이지만 모택동 등은 북으로 장강을 건너려던 계획, 즉 원래의 홍군행군로선을 완전히 개변하여 사천의 서영(叙永), 고란(古蘭) 일대를 진군하다가 사천, 운남, 귀주 3개 성의 교차지구인 운남 짜시에로 집결하여 새로운 대책을 강구하기로 하였다. 1935년 2월 6일, 양림소속 간부퇀은 중앙홍군을 따라 운남성 짜시지구(扎西地区)에 들어섰다.

홍군부대가 운남 짜시지구에로 집결하는 가운데 중공중앙정치국은 2월 5일부터 9일까지 짜시 경내의 대하탄(大河滩), 강서묘(江西庙), 수전채(水田寨), 짜시 등지에서 준의회의에 이은 또 하나의 중앙정치국확대회의, 즉 짜시회의를 련속 소집하였다. 회의를 보면 중앙홍군의 진군방향과 부대의 축소편성(缩编), 정치국 상무위원들 분공, 장문천이 기초한 <준의회의결의> 즉 <적들의 5차 '포위토벌'을 반대한 중공중앙 총화결의> 통과, 중앙과 전국 기타 쏘베트근거지 홍군전략방침 및 조직문제, 중공천남특위와 중국로농홍군 천남유격종대를 조직할데 대한 결정 등이 주요내용이였다.

짜시회의는 홍군장정가운데서 열린 또 하나의 중요한 회의로서 준의회의의 계속과 최후 완성으로 평가된다.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분공(장문천이 박고를 대신하여 당의 총책임을 맡고, 모택동과 주은래가 군사를 책임)과 준의회의결의 정식통과, 홍군의 전략개변 모두 통칭하여 짜시회의라고 하는 중앙정치국확대회의에서 최후로 완성되였다.

 

당중앙 총책임자 장문천과 홍군의 실제 최고지도자 모택동의 긴밀한 배합으로 전당, 전군을 지도하는 새로운 력사가 시작되였다. 잇따라 장정도중에 또 모택동, 주은래, 왕가상 3인군사지휘소조를 구성하고 장정중의 군사지휘를 책임지게 하여 준의회의후 중앙조직정돈이 기본상 완성되였다.

 

짜시회의의 또 하나의 중요한 성과는 회의에서 통과된 <준의회의결의>를 홍군부대에 분공, 전달하여 우리 홍군부대가 귀주 북쪽으로 진군하여 준의를 다시 점령하는 중대한 결책을 내린 것이다. 회의의 이 결의에 따라 2월 10일, 중공중앙과 중앙군위는 짜시회의 현지에서 군위종대간부회의를 소집하고 선참으로 준의회의와 짜시회의 정신을 전달하였다.

 

중앙군위 간부퇀 참모장 양림도 회의의 일원으로 참석하였다. 이 부분은 앞에서 이미 언급하였기에 이 장절에서는 더 전개하지 않는다. 양림은 준의회의이후 홍군진군로선과 토성전역 등을 통하여 당과 중앙홍군에서의 모택동동지의 지위가 수립되였음을 가까이에서 언녕 심장으로 받아들이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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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시회의 현지는 운남성 조통시(昭通市) 위신현 중남부인 짜시진에 자리하고 있다. 짜시진은 위신현인민정부의 소재지로서 전 현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를 이루고 있었다. 짜시진은 또 시정부 소재지인 조통과 286킬로미터, 성소재지 곤명과 680킬로미터, 중경직할시와 359킬로미터, 사천성 소재지 성도와 420킬로미터, 사천성 로주, 의빈 등지와 각각 200킬로미터 떨어진 운남성의 최북단에 자리한다.

 

"닭 우는 소리 3개 성에 들린다"는 말은 짜시를 두고 하는 말이렸다. 그만큼 운남, 귀주, 사천 3개 성의 접경지대에 위치하고 있었으니 이런 독특한 지리적 위치는 당년 중앙홍군이 어찌하여 귀주땅 토성 등 일대에서 적수하(제1차)를 건너고 사천땅 서영, 고란 등지를 경과하여 신속히 운남땅 짜시에로 집결할 수 있었는가를 잘 알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