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광인 련재작ㅣ중국혁명 속 우리 겨레 혁명가들(관내편) - 120
发布时间:20-10-16 05:25  发布人:金卓    关键词:   
기억하건대 우리 군이 준의를 다시 공략하였을 때 부대는 조금 휴식하면서 중앙군위가 천주교회당에서 퇀이상 간부회의를 열고 준의회의정신을 정식으로 전달하였다. 그날 모택동, 주은래, 주덕, 왕가상 등 동지들이 모두 회의장에 오셨고 장문천동지가 전달하였다(《송임궁회고록》, 해방군출판사, 2007년 8월 제2차 인쇄, 제53페이지).

이밖에 여러 자료들에서도 준의 천주교회당 시달을 언급하고 있다.

 

이는 왜서일가? 지금 보면 이 두가지 주장은 모두 신빙성을 갖고 있으며, 두곳에서 소집한 준의회의정신 시달이 사실이라고 보아진다. 전자는 군위종대 당간부회의이고 후자는 송임궁의 회고대로라면 홍군 퇀이상 간부회의이기에 이 두가지 주장은 완전히 성립된다. 회의 참석자범위가 다르기 때문이다. 같은 면은 회의참가범위로 보아 군위종대 소속 간부퇀 지도자들은 두번 회의에 모두 참석한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그러면 양림은 운남 짜시와 귀주 준의 회의시달에 모두 참석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필자는 2010-2011년 여름방학 홍군장정길 답사에서 운남 짜시와 준의 천주교회당 등지를 모두 찾아 보았다. 운남 짜시는 곧 이어지는 짜시부분에서 상세히 서술하여 보겠지만 준의답사시 준의의 천주교회당도 찾아보았었다.

 

준의 천주교회당은 홍군이 준의에 머무르던 시절 홍군총정치부가 자리잡은 곳으로서 오늘의 준의 홍화강구 로성양류거리(红花岗区老城杨柳街) 28번지에 자리하고 있다. 관련자료를 보면 이곳 천주교회당은 청나라 동치 5년(기원 1867년), 프랑스 선교사 사부르(沙布尔)가 일떠세우고 경당과 학당 두 부분으로 나뉘여졌다. 점유면적은 1만 3555평방미터이고, 주위 네면은 모두 담장으로 둘러졌다. 홍군이 준의에 들어선 후 홍군총정치부기관이 이곳에 자리를 잡으면서 천주교회당은 오늘날 준의회의 장소를 찾는 이들마다 찾아보는 관광명소의 하나로 되였다.
《준의회의 회의장으로 가다》에 따르면 중앙홍군은 1935년 2월말 3월초 기간 다시 준의성을 점령했을 때 당중앙은 준의 천주교회당에서 준의전역의 승리를 총화하는 한편 준의회의정신을 시달하는 홍군간부대회를 소집하였다고 쓰고 있다(중앙문헌출판사, 2009년 9월 출판, 제67페이지).
이 책은 준의회의기념관에서 편찬한 전문 준의회의소개서로서 회의하던 날 모택동, 장문천 등 지도자들이 보고하였다고 하면서 "홍군의 각급 지휘관들은 보고를 들은 후 과거의 우려와 불만정서가 깡그리 사라졌다. 저저마다 통쾌하다면서 찬성을 표시하였다. '좌'경모험주의의 쓴맛을 본 홍군장병들로 말하면 이는 인심을 격동시키는 대희사였다."(《준의회의 회의장으로 가다》, 중앙문헌출판사, 2009년 9월 출판, 제70페이지)라고 회의기분을 그대로 적었다. 이 기분장면은 송임궁의 회고록에 그대로 적히여있다. 아마도 준의회의기념관에서 《준의회의 회의장으로 가다》를 편찬할 때 송임궁의 회고록중 이 단락을 조금 바꿔 인용한 모양이다.
적수하 중류의 토성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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려평회의 계기로 전투부대를 충실히 하기 위하여 중앙군위는 명령을 내려 제1야전종대와 제1야전종대를 통합하여 군위종대로 하고 류백승을 사령원으로, 진운을 정치위원으로, 엽검영을 부사령원으로 임명하였다. 상강전역을 거친 후의 홍8군단은 홍5군단에 편입되였다. 준의회의를 거치면서 중앙홍군은 완전히 '좌'경로선의 '대이사'(大搬家)에서 벗어나 대정돈(大整编)을 시작하여 전투부대들을 보다 충실히 하였다.
간부퇀은 의연히 군위종대 소속이고 양림이 참모장으로 나섰다. 방대한 짐군대오(挑夫队伍)를 해산했는가 하면 버릴 물건은 아낌없이 버리고 크고 귀중한 물건들은 파묻어 버렸다. 장문천의 부인 류영의 회고에 따르면 능히 전투할 수 있는 사람들은 모두 전방에 배치되고 박격포, 포탄, 총기류들을 각 전투부대에 돌리는 등 대정돈을 거친 홍군대오는 정예하고 행동이 령활하고 임의대로 신속히 움직일 수 있었다(《준의회의자료휘편》, 중앙문헌출판사, 2009년 8월 출판, 제182페이지). 금방 뒤에서 펼쳐지는 홍군의 행동들이 이를 잘 말해주고 있다.

사실 박고나 리덕이 지도하는 중앙홍군은 강서 서금을 떠나 귀주 려평에 이르기까지 군사계획이나 군사행동이 대이사식이고 호남서부로 가는 것이기에 이사하는 각종 물건들을 움직이는 짐군만 해도 5000여명에 달하였다. 이 짐군대오가 중간에서 움직이고 홍1군단과 홍3군단이 좌우선봉으로, 홍8군단과 9군단이 두측 엄호를, 홍5군단이 후위를 막아서니 곳곳에서 얻어맞았다. 양상곤의 장정회고에 나오는 구절구절에 오죽했으면 분개한 장정초기의 팽덕회가 양상곤 등과 "이렇게 '관재'를 들고 걸으니 어디 싸우는 모양인가! 혁명을 장난으로 여기니 정말 엉터리가 없다"고 했을가.(《중앙홍군장정 적의 첫봉쇄선을 돌파》, 중국문사출판사, 2007년 5월 출판, 제81페이지).

 

모택동동지가 중앙홍군을 직접 지휘하면서 홍군대오는 생기발랄하고 기동령활한 모습을 되찾았다. 양림이 신임 참모장으로 나선 간부퇀도 례외가 아니였다.
준의회의후 중앙홍군은 세갈래(三路)로 나뉘여 귀주 서북부의 토성, 적수 방향으로 진군하였다. 그 목적은 홍군 원유의 ‘도강작전계획’에 따라 귀주 습수를 거쳐 사천의 로주, 의빈 사이에서 장강을 도하하여 홍4방면군과 회합하기 위함이니 홍1군단이 우로를, 홍3군단이 좌로를, 홍5군단과 홍9군단, 중앙종대가 중로를 지켜섰다. 당중앙과 중앙군위를 안전과 보호를 지켜선 양림소속 군위종대 간부퇀도 중로에서 나아간다는 말이다.
필자가 귀주성 준의시 습수현(习水县) 서부 토성진(土城镇)에 자리한 '사도적수기념관'(四渡赤水纪念馆)에서 입수한 관련자료에 의하면 중앙종대와 더불어 중로에서 나아가던 모택동은 습수현 토성 옛성구간을 행군할 때 길 량쪽이 모두 산과 산비탈로 되여있는 것을 보고 주덕, 주은래, 류백승 등과 추격중인 적들이 고립적으로 이 골안길에 들어서면 홍군은 토성 이동에 위치한 청강파(青杠坡)의 유리한 지형을 리용하여 우세한 병력으로 국민당 사천군 곽훈기부대를 섬멸하면 홍군의 장강도하순리를 도모할수 있다고 토의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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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중의 홍군력사를 헤아리면 1935년 1월 27일, 전진중의 중앙종대와 3군단, 5군단 등 중앙홍군은 귀주 적수하반의 토성진에 이르렀다. 관련 정보에 따르면 사천군(川军) 곽훈기부대는 토성쪽으로 몰리면서 토성 동쪽 6킬로미터 쯤 상거한 청강파와 영안사(永安寺) 등 일대를 홍군 먼저 점령하고 그곳에서 중앙홍군을 섬멸하려 했다.

이 정보를 입수한 모택동, 주은래, 주덕 등은 즉각 긴급회의를 소집하고 청강파 일대의 유리한 지세를 리용하여 우세한 병력으로 적들을 일망타진하기로 결의하였다. 이에 따라 홍1군단은 계속 북상하여 적수성을 탈환하고, 홍3군단과 홍5군단이 전투에 투입하기로 되였다.

 

1935년 1월 28일 새벽 5시, 드디어 홍군대오는 토성 청강파에서 사천군과 격전을 벌이였다. 모택동 등은 청강파 부근의 산언덕에서 지휘하고 홍군3군단과 5군단이 전투에 뛰여들었다. 청강파전적지의 청강파전투 소개를 그대로 인용하면 중국공산당의 2대 령도핵심, 공화국의 세분 국가주석, 한분의 국무원 총리, 7대 원수(주덕, 류백승, 팽덕회, 섭영진, 림표, 라영환, 엽검영) 등과 공화국의 수백명장군들이 토성전역이라 불리우는 이곳 청강파전투에 뛰여들었다.
전투는 갈수록 치렬해졌다. 홍군은 적들을 많이 살상했으나 받은 손실도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벌써 몇시간의 격전이 이어졌으나 그렇다할 전과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적들이 고지를 차지하고 결사적으로 저항한 데서 정오에 이르러 전투는 보다 가렬처절했다.

이를 전후하여 모택동은 우리 홍군이 입수한 정보에 문제가 있음을 보아냈다. 포로한 적병을 통해 확인해 보니 적들은 홍군이 탐지한 시초의 4개 퇀 6000여명이 아니라 6개 퇀 1만여명으로 알려져 홍군이 전투에 투입시킨 병력과 비슷하였다. 게다가 홍군의 적수는 국민당부 사천 왕패군으로 불리우는 곽훈기부대와 반좌(潘佐)부대이고 무기가 정예하고 탄약이 충족하였다. 한편으론 견고한 진지에 유리한 지형을 차지하고도 사천군 후속부대가 재빠르게 밀려든 데서 아군은 싸울수록 불리하여만 갔다.

 

모택동은 인차 북상중에 있는 홍1군단에 급령을 내려 돌아와 증원하도록 했으나 1군단은 그렇게 빨리 싸움터에 이를 수가 없었다. 중앙홍군은 물러설 길도 없고 견고한 진지도 없고 애오라지 적들과 결사전을 벌여가야만 했다.
험악한 정세하에서 모택동은 군위종대 예비대로 웬간해서는 1선 싸움에 내세우지 않는 간부퇀에 출전명령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양림은 진갱 퇀장, 송임궁 정위와 더불어 총칼을 빼든 간부퇀결사대(敢死队)를 조직하였다. 간부퇀결사대는 박격포와 중기관총의 엄호하에서 멸적의 함성높이 적진을 무찔러나갔다. 그 진두에는 양림이 서 있었으니, 양림은 결사대와 더불어 보총에 총칼을 꼬나들고 앞장에서 돌진하며 때론 적들과 생사결단의 육박전을 벌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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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남강무당 시절에 자기를 당할 자 없다고 오만을 부리던 일본교관과 과감히 창격전을 벌여 일본교관을 꺾어놓았던 양림이였다. 그 무예, 그대로 육박전에 나서니 적들은 밑둥잘린 통나무처럼 하나 둘 양림의 총칼아래 쓰러졌다. 1920년 10월 동북 연변 청산리대첩 싸움터에서 용맹을 떨치고, 1925년 봄 반동군벌 진형명을 무찌르는 황포군관학교 학생군 제1차 동정과 그 해 6월의 운남군벌 양희문과 광서군벌 류진환의 반란을 평정하는 전투들에서 용맹을 친 후 다시 보게 되는 양림의 싸움터 진실한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