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삼아에서 엄마를 그리다
发布时间:20-05-11 10:39  发布人:金卓    关键词:   

수필

 

삼아에서 엄마를 그리다

 

     (심양) 황혜영

 

 

  재작년에 이어 지난해에도 2월말, 3월초에는 해남도 삼아에 갔었다. 심양은 꽃샘추위도 그렇고 공업도시라 혼탁한 스모그 때문이여서인지 그맘때 만 되면 남편의 감기기침이 발작하군 하여 만성기관지염으로 전이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기후 좋고 공기 좋은 삼아로 료양을 간 것이다. 물론 우리 부부의 삼아 료양은 아들, 며느리의 효도선물로 이루어졌다.

  삼아에 가면 신기한 것이 굳이 신경을 쓰지 않아도 아침 일찍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심양에서는 저녁 일찍 자도 이틑날 아침이면 머리가 흐리터분해 커피를 마셔야 정신이 나군 하는데 삼아에서는 저녁에 늦게 자도 수면에 전혀 지장이 없는 것이다.

  삼아에 있는 기간 매일마다 아침 산책을 나갔었다. 동녘이 밝아올 무렵이면 이름모를 온갖 벌레들과 새들의 우짖는 소리가 귀맛좋게 들려온다. 이 때면 우리 부부는 어김없이 바다가 산책에 나선다. 해변가에는 망고, 고무, 야자, 종려나무들이 우거졌다. 자연의 혜택을 듬뿍 받으면서 자란 나무들 곁을 지날 때면 초목의 기와 향을 페속 깊이까지 들이 마실 수 있어 남편을 괴롭히는 기침이 차도를 보이는 것 같아 기분 만점이다. 우리 부부는 철썩이는 파도소리에 발맞추어 두발을 바다물에 적시면서 걷는다. 부드러운 모래가 발바닥을 간지럽히는 느낌이 기막히고 치마자락을 밀물, 썰물에 살짝살짝 적시는 시원함이 상쾌하다. 동쪽에서 서서히 떠오르는 아침해를 바라보며 걷는 기분은 설레임 그 자체다. 우리 부부에게도 저 뜨는 해처럼 정열에 넘치던 시기가 있었다는 데 생각이 미치면서 온 몸에 또 다시 새로운 정기가 샘솟는 듯하다.  

  어느날 아침 산책길에 로부인과 함께 어린 아이의 손목을 잡고 바다가를 거닐며 웃음꽃을 피우는 젊은 색시를 만났다. 가족 휴가를 나온 분들이 틀림없었다. 팔순이 넘어보이는 로부인의 얼굴에 활짝 핀 웃음꽃을 바라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가슴이 울컥 했다.

  친정엄마 생각이 났다. 친정엄마는 한평생 바다구경을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바다구경할 기회가 한번 있었는데 친정엄마 스스로 포기했다. 정년퇴직을 앞두고 단위에서 대련으로 려행갈 기회를 주었다. 먼저 스스로 경비를 대고 려행후에 보조금을 결산해 준다고 했다. 그런데 친정엄마가 길림에 사는 우리집까지만 와서 외손자의 첫돌 생일을 차려주고 돌아가서는 그 보조금으로 내 남동생의 결혼준비로 호랑탄자를 샀다는 것을 후에야 알았다. 그때 엄마의 바다처럼 깊은 마음 우리는 미처 알지 못했다. 젊은 시절에 랑만을 즐기고 문학을 좋아해 동시도 쓰시던 엄마가 얼마나 바다구경을 하고 싶었을까! 내가 그때  좀만 철이 들었더라면 엄마의 등을 떠밀어서라도 바다구경 시켜드렸겠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내 남동생의 결혼식을 앞두고 온돌에 불길이 들지 않아 뜯어내고 다시 고쳐야 했다. 우리는 모두 외지에 있고 아버지는 병환으로 다리를 잘 쓰지 못하니 일을 할 수 없었다. 고혈압인 엄마의 신체를 고려하여 아버지가 일군을 불러다 쓰자고 했으나 엄마는 삯전을 절약하기 위해 팔월의 불볕에 땀동이를 쏟으며 혼자서 흙을 파다가 온돌을 바르고 혼자서 회칠을 하고 뼁끼칠을 하셨다. 동생의 결혼식을 며칠 앞두고 엄마는 지친 나머지 끝내 뇌출혈로 쓰러지셨다. 오롱조 다섯남매를 키우시느라 일전도 쪼개여 쓰시며 사시느라 나들이옷 한벌 사입지 않고 애들이 먹는 반찬은 잡숫지 않고 남기셨다가 아이들 입에 넣어주시면서 한평생 고생하신 엄마 생각에 마음이 아파난다. 제일 마음 아픈 것은 내가 번 돈을 한번도 푼푼히 드리지 못한 것과 내가 사는 넓은 집에 엄마를 하루도 못 모신 것이다. 그리고 엄마와 려행 한번 같이 가지 못한 것이  가슴에 아픈 가시로 남아 있다.

  한번은 바다가에서 로인을 휠체어에 모시고 산책하는 한쌍의 젊은이를 보았다. 동북에서 온 분들 같았는데 손수건과 물병을 든 젊은 색시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로인과 소근소근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때도 나는 또 한번 울컥 했다. 우리 엄마는 뇌출혈 후유증으로 언어기능을 상실하고 반신불수로 거의 십년이나 바깥 출입을 못하셨는데 내가 고향과 천리밖에 떨어져 산다고, 내가 출근해야 한다고, 내가 사는 집이 단칸짜리 단층집이라고 모셔오지 못했다. 엄마가 앓는 동안 방학마다 친정으로 가군 했으나 별로 크게 해놓는 일도 없으면서 온갖 생색을 내고 앓는 엄마를 부담스럽게 했다. 지금 생각하면 불효치곤 너무나 큰 불효였다. 엄마가 한번도 가보지 못한 바다가에 와서 향수를 누리는 내 자신이 한없이 작아보였다. 다가오는 청명엔 엄마 산소를 찾아 나의 불효를 빌어야지 하며 또 한번 울컥했다.

  지난해 삼아에서 돌아온 우리 부부는 올해에도 삼아에 가기로 약속했었다. 하지만 코로나19로 인해 가지 못했다. 2월말, 3월초 나의 머리속에는 온통 삼아 생각뿐이였다. 바다가에서 깔깔거리며 조가비를 줏는 아이들 모습이 떠올랐고 그 아이들 심정만큼이나 동년에 젖었던 자신이 떠올랐다. 그리고, 일곱식구가 북적거리는 사대가족의 주부로 가슴속에 쌓였던 스트레스들을 출렁이는 파도속에 말끔히 씻어버리고 엄마, 안해, 며느리, 시어머니, 할머니 등 호칭앞에 한 부끄럼이 없도록 남은 날들을 살아가기로 자신을 떠올리군 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엄마가 저 세상에서 환한 웃음을 지으며 바라보고 계셨다.  

  삼아에서의 휴가는 남편에게는 몸과 마음을 다스리고,  나 자신에게는 엄마를 그리고 자신을 되돌아보는 좋은 계기였다. 언제 기회 되면 아들 며느리, 손군들과 함께 삼아 휴가를 다녀오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