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문문(崇文門)
작성자: lnsm004 날자: 2017-03-20 18:52:35 조회: 20

숭문문(崇文門)은 원나라때 문명문(文明門)이라 불렀다. 옛날 숭문문은 술수레가 지나던 성문으로 좋은 술들이 대부분 남쪽의 하북성(河北省) 탁주(涿州) 등지에서 왔기때문에 자연스럽게 북경 남쪽문으로 들어왔다. 술을 실은 수레는 외성의 좌안문(左安門)을 지나 숭문문에서 납세한 뒤 북경성 안으로 들어왔다.

숭문문은 원나라,명나라, 청나라 세개 조대를 겪은 성문으로 그 위치는 지금의 숭문문내대가(崇文門內大街) 남쪽 입구이며 정양문(正陽門) 즉 전문과 약 3KM 떨어져 있었다. 숭문문은 명나라 시기 성문을 개축하면서 1439년에 숭문문으로 개명됐다. 숭문문이란 이름은 <역경(易經)>의 '문명이건(文明以建)'에서 왔으며 문덕(文德)을 숭상하는 의미가 있다.

청나라시기 북경성내 주점들은 '남로소주(南路燒酒)'라는 간판을 내걸었는데 남쪽의 숭문문을 지났다는 의미가 있다. 즉 납세한 술이라는 뜻으로 정품임을 밝히기 위한것이였다.

또한 옛날 숭문문밖 동북쪽에는 철거북이 있었는데 그 모양이 고풍스러웠다. 전설에 따르면 이곳 해자가 있는 다리밑에는 샘구멍이 있는데 룡왕을 진압하고 샘구멍을 막기 위해 철거북을 앉혀 북경의 평안을 빌었다고 한다. 한편 옛날 통치자들은 풍수지리를 강조했던 관계로 북경성 남쪽에는 성문이 3개 설치됐다. 중앙에는 정양문이고 왼쪽은 선무문, 오른쪽은 숭문문이였다.

북경성 성문변천사에 관해 말하자면 명나라시기 연왕(燕王)에 봉해져 북경에 살았던 주체(朱棣)가 조카 건문제(建文帝)의 황위를 탈취한후 연호를 영락(永樂)이라 불렀으며 도읍을 남경에서 북경에 옮기기로 결정했다. 그는 영락 4년인 1406년부터 원대도를 기초로 북경성 개축을 시작했으며 영락 18년인 1420년에 건설을 마쳤다. 북경성은 기존의 원대도 토성을 기초로 남쪽성벽을 남쪽으로 이동했고 북쪽 성벽과 동, 서 성벽의 일부를 철거하고 더 튼튼한 벽돌로 성벽을 다시 건설했다. 또한 원대도의 11개 성문은 9개로 개조됐는데 남쪽의 3개 성문은 변함이 없었으나 그 이름이 바뀌였다. 그래서 원래의 문명문이 지금의 숭문문으로 된것이다.

한편 명나라 가경(嘉靖) 1552년에 북방 소수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북경성 밖에 외성을 한층 건설하기로 했으나 재력과 물력의 제한으로 북경성 남쪽 성벽밖에 동서방향으로된 좁고 긴 성벽을 건설하는데 그쳤다. 이 성벽이 바로 지금의 동쪽으로 광거문(廣渠門)에서 부터 서쪽의 광녕문(廣寧門)에 이르는 외성(外城)이며 라성(羅城)이라고도 부른다. 이렇게 외성성벽이 건설되면서 숭문문은 내성 성문이 됐고 그 주변에는 인가가 점점 늘어 점포가 많아졌으며 숭문문을 지나는 벼슬아치와 상인들이 날따라 증가했다.

지금의 숭문문은 철거된지 오래고 해자 물길은 하수로로 개조됐다. 옛 성벽자리에는 현재 널찍한 도로가 건설됐고 차량과 행인이 끊이지 않는다. 도로량측이 빌딩숲을 이루고있는 숭문문은 그 지하에 지하철 2호선이 달리고있어 상업과 교통이 발달한 번화가로 변모했다. 그야말로 700년전 원대도와는 비할수 없는 모습이다.

국제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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